2023223일 목요일. 맑음


여행은 언제나 사람을 들뜨고 설레게 한다. 요즘 사랑하는 아우님 희정씨의 남미 5개국 여행기를 읽으며 대리 만족 중이다. 동남아나 몽골처럼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곳이라면 가볼까 하다 가도, 이제 오랜 여행을 하기엔 나나 보스코도 나이가 들고 몸도 안 받쳐주니 어딘가 선뜻 나서기가 망설여지는데, 듣고 읽는 여행 만으로도 행복하다. 로마에 사는 10수년, 원 없이 여행을 했다. 코로나 전에는 바로셀로나와 돌로미티를 다시 찾기도 했지.


"여행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라는 말처럼 해외 여행에서 돌아올 적마다 한국에 도착한 소감은 "역시 내 나라 내 땅, 우리 지리산이 제일 좋다!"였다. 그러면서 더는 여행 가기가 싫어진다. 심지어 국내 여행까지도, 서울집에 오가기도 싫으니 마고 할매 치마폭에 폭 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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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씨는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까지 갔는데 이젠 한 나라 정도 남은 듯하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니, 엘 찰텐과 페리토 모리노빙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국립공원 등은 나도 가 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하기야 우리도 5년 전 네팔 갔을 적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해돋이를 보러 그렇게 일찍 일어났다) 몇 날을 이동해야 하는 강행군은 젊음이 받쳐주어야 가능하다. 만년설이 가득한 산봉우리와 호수, 신비한 파란색 만년설... 그 어느 것도 '찾아가는 고생과 발품을 팔지 않으면' 즐길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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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강풍으로 소나무 가지들이 많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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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요즘 움직이는 반경이라야, 어제 점심식사 후 운서쪽으로 시간 반쯤 걷고, 오늘 세동으로 그만큼 걸은 게 전부. 아주 느릿느릿 한 시간 반 내지 두 시간 걷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운서로 오가는 길에는 휴천강을 내려다 보고, 강 건너 언덕 남호리에 우리 땅에 심어놓은 신선초가 싹을 올리나 멀리서 건너다 보는 것, 세동으로 가면 와불산을 올려다보고 휴천강 건너 법화산을 건너다 보는 것으로 그친다. 그나마 산보를 갔다 오면 지쳐서 보스코는 한 잠 잔다. "그, 나이에 걸맞게 내 몸의 명령을 따르고 겸손해져야지." 나는 돌아와서도 텃밭의 쪽파 이랑들을 손질할 여력이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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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느티나무독서회 숙제인,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사 2022)를 읽고 있다. 빨치산의 딸을 읽은 후 오랜만에 정작가의 글을 읽는다. ‘해방일지라고 해서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전투를 생각했는데, 삶 속에서 인간적인 배려와 따뜻한 인간애가 곳곳에 스며있어 '참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빨치산으로 '전남도당조직부부장' 직함을 지녔던 아버지(정운창)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그 사람들을 감화시켜 왔는가를 알아가게 만든다. 아버지가 바가지 긁는 어머니(그이도 '남부군 정치지도원 이옥남'이라는 직함이 있었다)를 꼼짝 못하게 누질러 앉힐 때마다 하던 말씀.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 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을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는 민중 속에 민중을 위해 민중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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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소위 '보급투쟁'을 나가서 보면 이미 등을 돌린 인민들은 악착같이 식량을 숨겼다. 한번은 식량을 뒤지던 집 다락에 숨어 있던 21살의 순경을 발견한다. 23살의 빨치산은 "순갱을 그만둔다고 허면 살레줄라요." 순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빨치산은 그냥 '퇴각'했다. 훗날 빨치산이 되겠다고 산속까지 찾아온 그 순경을 아버지는 기어이 쫓아 보낸다. 30년 후에 그 순경이 따진다


"한 명이라도 더 포섭해야 쓰는 디 왜 쫓갔소?"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은혜 갚을라고 하는 것은 신념이 아닝가요?" "아니요 그것은 신념이 아니요, 사람의 도리제. 그짝은 순경을 그만 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 했소. 글면 된 것이오. 긍께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자기 앞가림이나 함시로 잘 사씨요." "... ..."


이렇게 올곧고 바른 정신으로 살아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죽으면 꼬실라서 암디나 뿌레삘라"는 아버지의 평소 말씀대로 아버지가 늘 다니던 곳곳을 찾아 유골을 뿌려드리던 딸은 말한다. "가부장제를 극복하고, 소시민성을 극복한 진정한 혁명가 합리주의자가 우리 아버지였다." 장례식장에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보고,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는 딸의 고백이 잔잔한 진동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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