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3년 2월 21일 화요일. 맑음
얼마 전부터 속이 많이 쓰리고 아파 궁리 끝에 그제 일요일부터 ‘효소 절식’을 시작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짐승이 몸이 아프거나 특히 위장이 거북하면 먹기를 멈추고 아픈 곳을 달래며 몸이 좋아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짐승보다 똑똑하다는 인간은 약을 먹어가며 거북한 위장에다 집어넣고 또 넣으니 어디 견디겠는가? 아프면 특히 나처럼 간간이 속이 아프면, 물 많이 마시고 굶는 게 상책이다.
더구나 우리 미루가 가까이서 ‘팔보효소 절식’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좋은 효소를 생산하니 안 할 이유가 없다. 미루가 나더러 하는 말로는 “나이가 있으니까 길게는 말고 3일 절식, 그다음 (3일 보식 대신) 5일 보식”을 하란다. 보스코는 (이럴수록 하루 세 끼 아내가 정성껏 차려주지만) 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해서 불만이 많은데 그래도 딸의 말은 어지간히 잘 듣는 편이다. 절식을 하며 꼭 지킬 수칙은 물 많이 마셔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설하는 것과, 걷고 걸어서 몸을 가볍게 하는 일이다.
딸의 엄명으로 우리 둘은 어제 오후 산보를 나섰다. 바람이 무지막지하게 부는 날이었다. ‘소담정’ 앞을 지나다 보니 데크 공사로 용접을 하고 있었다. 땅을 밟고 일을 하니 다행이지 지붕 위 공사였으면 사람도 날아갈 풍세였다. 소담정 도미니카가 바람이 너무 세니 산보 가지 마라고 우릴 말렸다. 그래도 ‘인간 승리 전순란’은 보스코를 걸리겠다는 일념에서도 그냥 나섰고, 강바람이 좀 덜한 휴천강 오른 편 샛길(보스코는 '으슥한 길'이라고 부른다)로 접어들었다.
강가의 소나무숲은 지난번 대설과 오늘 강풍으로 솔가지가 찢어져 사방에 널려 있다. 더구나 키가 큰 대나무는 온몸으로 바람을 지켜내며 으르릉으르렁 신음으로 가슴을 오그라 들게 만든다.
또 강물은 어떻구! 도마 위에 얹고 긁어대는 물고기 비늘 마냥 푸른 물결이 바람결에 와르르 솟다 가라앉다 대단했다. 뭔가 일을 낼 것 같은 바람 부는 날이다. 평소에 다니던 길의 끝은 강으로 이어져 거기까지 가면 물귀신이 끌고 들어갈 것 같아 직전에서 서둘러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소담정 공사 현장을 지나는데 데크밑 차고 구석에서 연기가 폴폴 일더니 순식간에 우리 눈앞에서 불길이 확 솟는다. 현장에 사람이 없는데? 좀 전에 하던 용접 불똥이 튀어 불씨가 되었나 보다. 그 집 대문을 벌컥 밀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집안에서 태평하게 새참을 들던 장정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불났어요!" "불이요!" 그들은 화재보다 내 목청에 더 놀랐을 게다.
다행히 발화 초기라 세숫대야 네 번으로 불은 껐고 동네 사람도 강 건너 산불 감시원도 미처 못 보았는지 화재 신고나 그에 따른 소방차 출동 없어 조용히 수습되었다.
우리가 그 시각에 그 집을 지나가지 않았으면... 아니 우리가 강풍 속에 산보를 안 나갔으면... 아니 산보에서 평소보다 일찍 돌아오지 않았으면... 아니 요즘 내 위장이 쓰리지 않아 절식을 안했더라면... 바짝 마른 차고 목재 지붕과 방부목 데크로 불이 옮겨 붙었더라면... 데크에서 소담정 본채로, 그 집에 등을 붙이다시피한 가밀라 아줌마네나 드물댁으로 번졌더라면... 더구나 가까운 산으로 ....
밤늦게 소담정 주인이 전화를 걸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린다면서 "사모님네 아니었으면 어찌 됐을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요." 한다. 나로서는 "그대가 기도생활 잘하고, 늘 남들 도우며 착하게 살았기에 하느님이 잠깐 내게 날개를 달아주셨나 봐요." 라고 다독여야 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 라는 구호가 헛것이 아니었구나, 저렇게 불꺼진지 한참 지나도 가슴들이 콩당거린다니!
휴천면사무소 부설 복지회관에서 오늘 함양군수와 휴천면 주민과의 대회가 있다고 하여 9시 20분까지 부지런히 갔다. 나이든 할베 할매 면민들이 그런 자리에 관심을 갖고 그렇게 많이 모이는 열의가 놀라웠다. 나도 문하마을 입구에 흉물스럽게 버려진채 폐교된 문정초등학교 건물을 철거 해 달라는 발언을 했다.
2003년 11월에 마산대학에서 욕심을 내서 샀는데 20년이 지나도록 귀신이 출몰하도록 그냥 놓아두어 귀곡산장이 되었다. 군민을 위한 군수라면 그 학교 터를 개발하든지, 팔게 하든지, 흉가를 헐든지, 무슨 수를 내라고 제언했다. 미루말에 의하면 이 번 군수는 예전 군수와 달리 겉만 번지르한 정치인이 아니고 무언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일 하려는 사람이라니, 그리고 아직 임기가 3년이나 남았으니까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고 기다려 봐야겠다.
오늘 오후 송전마을까지 산보를 하면서 로사리오를 바치는데 우리 큰딸네 여동생 숙이의 수술이 무난히 끝났다는 전화가 왔다. 수술 후 중환자실 아닌 일반병실로 돌아왔다니 때마침 그미를 위해 바치던 로사리오에 보람을 느꼈다. 둘째 순둥이는 제주 여행 중이고... 귀요미는 출장 중이고... 꼬맹이는 어찌 지내는지... 로사리오를 굴릴 명분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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