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9일 목요일. 맑음
수요일 아침. 임신부님 생일이어서 '은빛 나래단'에 벙개를 쳤다. 남해 형부는 이웃 사람을 점심에 집으로 초대한 터라 못 온다 하고, 백수인 나머지는 만나자면 만난다. 동의보감촌에 있는 '산청각'에는 작고 소박한 방이 여러 개 있어 음식을 먹고 축하하기엔 제격이다.
내가 식사를 내면 케이크는 미루가 사고, 미루가 식사를 내면 후식은 내 몫. 식사 후에 미루가 들고온 바구니에서 식탁보를 꺼내 깔고 찻잔과 접시를 진설하고 과일과 티라미수와 커피로 축하식을 했다. 소박한 행사지만 어디에도 찻상을 차려내는데 익숙한 팽주요, 작은 일도 챙기는 미루는 이벤트의 여왕이다. 보스코와 나는 자기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까지 잊어버리기 예사인데 주변 사람들 기념일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챙겨주는 것도 대단한 성의다. 보스코가 자기가 '데꼬들어온 딸'이라며 그미를 '귀요미'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신부님이 태어나실 때는 위로 누나(임봉재 회장)가 있었지만, 그 당시 세태로는 태어나도 '딸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신부님 위로 '아들아'가 둘 태어났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어 세 번째 비리비리한 아들아는 '또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사람 취급도 안 했단다. 그 담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살아있자 '이젠 안 죽겠거니' 하고 호적에 올려주더란다.
어려서부터 성당이 이웃집이라 성당 마당에서 놀며 컸고 매일 미사 다니면서 복사를 하자 '잘한다. 넌 신학교나 가라'하길래 '아, 난 신학교 가야 하는 갑다' 해서 거제 촌놈이 일약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를 가게 되었단다.
우리 작은아들 빵고가 매일 살레시오회 신부님들 사이에 크며 옆은 볼 생각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살레시안이 된 경우와 비슷하다. 부르심은 각자의 자리와 모습에 따라 이렇게 순탄하게, 거리낌 한 번 없이 일생을 그 길로 가게도 하신다. 반듯한 사제 임마르코 신부님을 보면 '신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집에 돌아와서는 보스코가 전날 보았다는, C.S.루이스가 쓴 『섀도우랜드』 원작 소설의 영화를 보았다. 성바오로 출판사에서 나왔던 『나르니아 연대기』를 재미있게 읽은 터여서 친숙한 작가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마의 옷장에서 상상의 세계를 꿈꾼 어린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늘 안개가 끼고 비가 오는 런던 옥스포드 대학교의 칙칙한 관사에서 독신으로 살던 교수가 늘그막에 사랑하게 된 이혼녀 조이와 사연 있는 결혼을 하고 머지않아 사별한 이야기는 명작으로 남았지만, 엄마를 잃고 양아버지 루이스 교수의 손에 큰 더글러스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카메라는 앤서니 홉킨스의 '늘 그렁그렁하고 어린아이 같은 두 눈'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것은 내가 50년 간 마주 보아온 보스코의 눈길이기도 하다.
오늘 '느티나무독서회'는 김지수 작가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다. 이 책을 내가 처음 읽은 것은 마침 보스코가 폐암수술을 받던 시기여서, 그의 병실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지성인의 생각과 사상을 읽으면서, 내게 닥친 남편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라는 『섀도우랜드』 속의 대사 그대로였다.
이어령씨가 자신의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을, 딸의 죽음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자신도 죽음의 손을 잡고 떠날 때까지 걷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 '입이 벌어지고 썩고 시체 냄새가 나는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 '죽음과 면담을 예약하고 나면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 앞에 서 뒤돌아보면 인생 전부가 선물이었음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춤추며 나비처럼 죽음을 맞을 수 있었으면.' 독서회를 마치고 열 시가 넘는 겨울 밤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떠오르던 심상들이다.
보스코는 요즘도 헬렌 니어링의 『활기찬 노년과 빛나는 죽음을 맞으라』(빈빈책방 2022)를 머리맡에 두고 몇 페이지 읽다 잠든다. 떠날 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음을 우리 엄마 돌아가실 때 피부로 절감했다. 마지막 숨을 가볍게 내쉬면서 '모두 이뤄졌다'는 고요한 표정으로 한 백 년의 삶을 거두시던 엄마여서 나도 평온한 마음으로 보내드릴 수 있었음에 감사드렸다. 내 죽음이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기를,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그런 모습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