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순란 글방
지리산 휴천재 일기
2023년 1월 26일 목요일. 흐리고 눈 날림
날씨가 차다고 하지만 집안 온도가 21도나 되니 수도 얼겠다는 걱정은 안 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세수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가 ‘아차!’ 싶었다. 큰딸 이엘리 말로는 TV에서 “온수가 찬물보다 더 잘 어니까 살짝 틀어놓으라”고 했다던데, 그 생각을 미처 못한 내가 한심스럽다.
부지런히 마천으로 나갔다. 사후 약 방문이지만 철물점에서 열선(熱線)을 사다가 목욕탕과 이층 부엌 싱크대 온수 꼭지에 둘러놓았다. 어짜피 날이 풀리면 녹겠지만 여러 날 춥다니 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도 했다.
“왜 더운 물이 상온 물보다 더 빨리 얼까?” 사이언스지에 실린 기사를 찾아보았다. 탄자니아의 중학생 음펨바가 실습시간에 자기가 만든, 덜 식은 아이스크림이 더 차게 식혀서 냉장고에 넣은 다른 학생들의 아이스크림보다 더 빨리 언 것을 보고 놀라 몇 번이나 실험을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단다. 다른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했지만 자기 학교를 방문한 물리학자 오스본 교수에게 자신의 실험결과를 얘기하자 그 교수는 아이의 말을 무시 않고 음펨바와 함께 여러 번 실험을 후에 1969년 물리학 학술지에 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 때 소년의 이름을 따서 '음펨바 효과'라고 알려졌단다. 같은 냉각 조건에서 높은 온도의 물이 낮은 온도의 물보다 빨리 어는 현상이란다. 25도 물이 가장 늦게 얼고 90도 물이 가장 빨리 언다니... 진즉 알았더라면 이런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아는 게 힘이다.
날씨가 차졌지만, 하늘은 맑고 산은 상큼하게 높다. 전날 얼마나 바람이 소란하게 불었던지 정자 돌식탁 주위에 겹으로 세워둔 의자들이 단체로 날아갔다. 보스코는 아기곰처럼 옷을 껴입고 마당에 나둥그러진 의자를 주워다 제자리에 놓았다. 무겁고 긴 의자도 뒤집히고 이층테라스에 세워둔 묵직한 접이식 테이블도 넘어졌다.
둘째딸 순둥이가 당뇨로 먹는 걸 놓고 아들들한테 구박을 받자 전서방은 그게 늘 마음에 걸렸던지 '연금 올랐다'는 핑계를 대며 그미가 그렇게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과 빵을 잔뜩 사들고 들어오더니 “새끼들 모르게 어서 먹어!” 하고서는 가게로 나가더란다. 당뇨환자 내 딸한테 전서방이 잘하는 일인지 못하는 짓인지 헷갈리지만, 그 얘기를 듣고 멀리 있는 나까지 기분이 좋다. 살이 쪄서 살 빼야 한다는 말을 듣는데도, 빵고신부가 집에만 오면 먹방을 만드는 나다. 나는 굶어도 식구들에게는 조절이 안 된다. 병약한 아내를 향한 전서방의 사랑, '데꼬 들어온 딸'에 대한 이 어미의 안쓰러움, 일년에 한두 번 보는 아들에 대한 마음이 다 그렇다.
더운 물이 안 나오니 집안일이 반으로 줄어드는 일도 있고 두 배로 늘어나기도 한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일은 물론 '일단 보류'로 줄었지만 빨래를 하려 아래층 부엌에서 따뜻한 물을 동이로 퍼다 2층에 있는 세탁기에 섞어주는 일은 고달프다.
이틀 고생을 시키다가 오늘 오후 4시쯤 마을회관에 가 있는데, 보스코가 "더운 물은 터졌는데 화장실은 난리났다."고 전화해서, 뒷처리가 자기 능력 밖이라고 와 보란다. 올라와 보니 깔판 매트들과 수건들이 물 폭탄을 맞고 널브러져 있다. 젖은 바닥깔개와 벽에 걸린 목욕수건들을 거두어 세탁기에 돌려 널었다.
오늘 찬바람에 눈발은 펄펄 날리는데 바쁜 일을 마무리 짓고 이제는 좀 한가할, 산속 사는 친구네 집에 전해 줄 게 있어 잠깐 갔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휴천강은 꽁꽁 얼어있고 더 멀리 건너다 보이는 남호리, 그 언덕에 우리가 갖다 놓은 콘테이너가 파란색이어서 더욱 추워 보인다.
서울집을 재건축하면 철거된 살림살이 갖다 놓겠다고 설치했는데, 문정권이 야심 차게 시작한 3080(다세대 연립 주택 사는 서민들, 남의 집 세 사는 세대까지 아파트에 살게 해 주겠다던) 주택 사업이 정권이 바뀌며 막을 내려, 우리가 45년 살아온 '빵기네집'은 그대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서울집 아래층에 집사로 살던 레아가 집을 비우겠단다. 동빙고동에 있는 자기 아버지 집에 살던 조카가 군에 가며 집을 비워 그 집으로 들어가야 해서 2월 말에는 이사가겠단다. 같이 살던 사람이 떠날 때마다 나는 새 사람 찾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 좀 오래들 살아주기 바라는데 우리 조상이 유목민이었는지 사람들이 하도 자주 이사를 다녀 또 새 사람을 맞아야 한다. 그때마다 내 주변에서는, 지은 지 60년 된 단독주택 처분하고 이사하라고들 하지만 내가 낡아졌는지 낡은 집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