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0일 화요일, 맑음


보스코 나이가 80이 넘자 주변을 둘러보니 여러 친구, 지인들이 먼 길을 앞다투어 떠나갔다. 마음 아파하면서도 워낙 방안퉁수여서 그는 서울에 오더라도 누구를 만나러 집밖에 나가기를 싫어한다. 그 대신 친구가 찾아오는 건 엄청 좋아하기에 올가을 큰 수술을 겪으며 의기소침해 있는 그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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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서울에서의 마지막 모임은 보스코와 가장 가까운 친구 둘을 동부인하여 초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대학 교재 출판으로 유명한 '경세원(經世院)' 사장 김영준씨는 보스코 책을 6권이나 출판해주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단테의 제정론, 피코의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라틴어 교재(라틴어첫걸음과 고급라틴어), 보스코의 은퇴논문집 사랑이 진리를 깨닫게 한다』.  최근 일선에서 물러나 딸이 출판사를 물려받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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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동창이면서 세례 대자인 종수씨는 대부님을 하늘같이 위하는 친구로 20여 년 전 교통사고로 4개월 이상을 코마 상태로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 서강대에 출퇴근하는 길에 자주 들러 기도해준 벗에게 고마움을 품고 있다. 소생의 가망이 없으니 포기하고 장례를 준비하라는 의사들의 말을 물리치고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핀 아내의 정성이 하늘을 움직였다.


그는 보스코를 대부로 세우고 돈루아(Don Rua: 성인 돈보스코의 후계자)를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영세하였다. 돌아가신 종수씨 어머님도 4년전 보스코한테서 글라라라는 세례명으로 대세(代洗)를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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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점심에는 성탄인사를 드린다고 작은아들 빵고신부도 답십리에 일 보러 가는 길에 집에 잠깐 들렀다. 사제가 있어서 "신부는 식탁에 강복하소서!" 했고, 피자 두 쪽을 먹고는 살레시오 신부의 본가 방문답게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아들 하나는 국제봉사활동으로, 하나는 청소년 사목으로 헌신하려고 출가(出家)했으니 외인(外人)이려니 생각한다. 그 대신에 딸을 넷이나 맺어주지 않으셨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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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과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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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씨는 애처가 중 애처가라 "아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해달라"고 사전 주문을 했다. 같이 온 영준씨는 워낙 입맛이 토종이라 피자 먹기가 힘들어 보였지만 친구들과 얘기 나누는 것 만으로도 배부른 일이기에 별로 신경은 안 썼다영준씨 내외가 다른 약속으로 먼저 자리를 뜨고 종수씨는 함께 넘어가는 인생의 고빗길을 서로 격려하다 갔다


아쉽게 세상을 떠난 친구들 얘기와 살아는 있지만 정신적 신체적 경제적 곤경에 처한 사람들 얘기로 가슴이 아팠다. 돌아가신 엄마 곁에서 내가 속마음으로 여러 번 빌던 대로 "안 아프면 오래 사시고 아프면 빨리 돌아가시게 해 주십사!" 라던 모진 기도가 떠올랐다. 


내일 눈이 다시 온다니 오늘 중으로 휴천재에 내려가기로 서둘렀다열흘 가까이 지내고 나면 '침대 시트를 벗겨 빨래해 널고 새 시트로 갈아 놓는다.' '집안 쓰레기는 다 치우고 비닐 봉지 담은 것은 분리수거로 처리하여 내놓는다.' '집안을 말끔히 걸레질하여 한두 달 뒤에 올라오더라도 깔끔한 분위기를 마련해 놓고 떠난다.' 서울 올라오기 전 휴천재도 마찬가지다.


서울을 벗어나면서 늘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과 작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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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딸 얘기로는, 자기 아파트 12층에서 내려다보면, 출근하는 남편에게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들려 내보내는 모습에 속이 상하더란다. '가족을 위해 직장에 돈 벌러 나가는데 손에 쓰레기 국물 묻히게 하고 싶을까?' 하며 그 아내들 속을 모르겠단다. 그미만 해도 구세대다. 요즘 젊은 여자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나더러 애 데리고 어떻게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가게 하느냐?'고 불평하리라. 집안 쓰레기 분리수거를 한 번도 안 해본 보스코 같은 남자라면 '신의 아들' 급에 들 테고 미래 어느 박물관에 모셔야 한.


1130분에 서울 집을 나섰는데 차가 막혀 상일IC까지 1시간 40분이 걸렸다. 서울에 왔다 지리산으로 돌아갈 적마다 '혹성 탈출'로 지구에 귀환하는 기분이다. 우이동과 함양 두 군데를 오가는데 서울집에서 두 배나 긴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지리산 휴천재가 더 '내 집 같은 포근함'을 주니 어디서 어떻게 정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멀리 지리산이 희미하게 바라보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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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가 다 되어 휴천재에 도착해 보니 성탄절 인사와 선물과 새해 달력들이 많이 배달 와 있다. 특히나 보스코의 석달 전 수술을 염려하여 '바오로딸 수녀님들'이 연서하여 건강을 빌어주신 큼직한 카드는 보스코가 교회 내에서 얼마나 사랑받는지 드러내 보여 그도 나도 큰 감명을 받았다.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달리는 은총이라 일컫는다)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따스한 손길과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도달한다. 결혼생활 50년 동안 우리가 절감한 체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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