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5일 목요일. 함박눈
눈이 많이 온다고 TV에서 소란했는데 어제는 체질하다가 쌀가루를 흘리듯 싸래기를 뿌리다 말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펑펑 함박눈이 쏟아진다. 올겨울 제대로 내리는 첫눈이기도 하다. 지리산 휴천재라면 보스코가 마당에 나가 하트를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어느 여자 이름을 새길 텐데...
우이동집은 앞집이 돈대 위에 솟아올라 겨울이면 동토라서 눈이 한번 내리면 봄이 올 때까지 녹을 생각을 않는다. 도로나 마당과 뒷동산 푸른 나무에 얹힌 눈이 녹아서 물방울로 흘러간 뒤에도 우리 마당은 안 녹는다. 말하다면 우리 마당은 기온으로는 인수봉과 맞먹는다.
지난 금요일 진주의 정형외과 병원에서 링거를 맞는데 미숙한 간호사가 내 팔을 네 번이나 찌른 뒤에야 겨우 링거를 연결시켰다. 그것마저 도중에 혈관이 터져 피가 솟기에 그만 맞기로 하고 바늘을 빼버렸다. 저 병원 다리 무릎 수술로 이름난 까닭을 모르겠다.
우리 동네 소담정 도메니카의 링거 주사는 실수란 없었다. 워낙 노련한 간호과장 출신이지만 주사 놓는데도 센스와 재주는 타고나나 보다. 서울이 춥다는 뉴스에 그미가 걱정스러워 전화를 해왔다. 내가 진주에 있는 병원의 주사 솜씨를 얘기하니까 주사는 간호사의 첫째 기술이라며 '사모님이 이상한 병원에 가신 것 같다'며 의아해 한다.
잉구 어매도 그 병원에서 고관절 수술을 하다 세 번의 감염과 재수술로 무려 1년 반을 병원 신세를 지며 고생했다면서 '왜 하필 그 병원을 가셨느냐?' 나를 나무란다. 내 오른 눈 백내장 수술도 함양에서 천여 건의 수술을 했다고 자랑하는 안과에 갔는데, 용하다는 그 의사는 내 수술 바로 전날 다른 곳으로 떠났고, 새로 온 지 사흘 된 미숙의(未熟醫: 보통 '돌팔이'라고 욕먹는다)한테 수술을 받고 감염에다 재수술을 거치고도 10년이 다 된 지금도 그 눈으로 고생하고 있다.
실수는 한번으로 족하다. 그 병원에서 찍은 MRI 사진을 갖고 오늘 아침 수유리 박순용정형외과엘 갔다. 내 검사결과지를 읽은 원장은 “70년 된 집이라면 당연히 낡았겠죠? 낡았지만 비바람 들이치지 않는다면 구태여 부수고 새집 지을 필요는 없어요. 아주 아프지 않으면 당분간 그냥 쓰세요. 그러다 좀 심하게 아프다 싶으면 내시경을 넣고 종기를 긁어내는 치료가 있어요. 집으로 치면 도배하고 장판만 하고도 살만하다 싶은 거죠. 그러다 비가 새고 창문이 덜렁거리고 찬바람이 들이쳐 도저히 더는 못살겠다 싶으면 연골을 바꿔 끼는 대수술을 받는 거구요.... 웬만하면 그냥 쓰고 사셔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큰일 날듯' 수술을 재촉하던 진주의 그 병원과 사뭇 다르다. 그래서 '장사하는 병원'과 '치유하는 병원'은 환자로서 가보면 당장 구분이 되더라는 소담정. “오신 김에 5차 코로나 예방주사나 맞고 가세요. 최신의 예방약이 어제 도착했어요, 그나마 공짜니까요.”
성탄을 앞두고 도메니카는 상주 가족에게로 떠나고, 스.선생네는 모레 부산으로 성탄 지내러 간단다. '우리만 지리산에 남겨놓고 다들 가버리면 어쩌죠?' 라니까 '오래된, 마음 맞는 친구 둘이만 있으면 다 되는 것 아냐요?'라고 대꾸한다. 그렇다. 결국 둘만 남고 마지막엔 누구나 혼자다. 그 외로움을 다 견뎌내야 사람이다.
어제 오후에 보스코의 폐암 수술 3개월 경과를 보러 보훈병원엘 갔다. CT 촬영결과에 '아무 이상 없고 잘 마무리됐다'며 폐암 수술 후 먹는 약은 더 이상 처방해주지 않았다.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정작 환자인 보스코 본인은 자기가 폐암환자라는 개념마저도 없다는 점이다. '기차 막차 티켓 예매한 심경'으로 차분히 나날을 보내고, 그래도 '남은 날이 적다' 느껴지는지 요즘도 새벽 서너 시면 침대를 나가 서재 책상에 앉는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가장 방대한 저작 "시편 상해(詳解)"를 붙잡고 씨름하는 중. 적어도 7년은 걸리는 작업이라는데 그래도 오래 살 생각인가 보다.
오늘 저녁에는 주원준 박사네 가족이 왔다. 큰애는 이름이 '주인', 작은애는 '주연'. 아명은 '나무'와 '물가'란다. 둘이 합치면 물가의 나무처럼 쑥쑥 잘 자라리라는 부모의 소원이 담긴 이름들 같다. 두 살 터울의 형제가 고만고만한 키에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두 애가 얼마나 붙임성 있고 활동적인지 시아와 시우를 보는 듯 사랑스럽다. 사내애들이라서 이층과 삼층 다락까지 싹 탐험하는 호기심을 보인다. 빵고 어렸을 적 집에 오는 안손님들의 핸드백을 다 열어보고 뒤집어보던 호기심이 떠오른다('소매치기' 오해도 살 법했다).
성탄맞아 나름대로 집안을 꾸미고 성탄 그릇들을 내놓았는데 '작은 손님들'이 다녀가니 축제 기분이 돋는다. 늙으면 손주들과 살아야 행복한 이유이기도 하고 젊은 학자와 학문을 얘기 나누는 보스코의 행복한 얼굴도 같은 이유에서다.
손님맞이 피자를 굽는 오후 내내 어깨가 뻐근하고 온 몸이 나른하고 쑤셔 이상하다 싶었는데 까닭을 자문해 보니까 아침에 정형외과에서 맞은 코로나 예방주사 후유증이다. 오늘은 좀 일찍 자리에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