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8일 목요일. 맑음


수요일 아침. 한여름엔 왕산 위 잘 차려 놓은 밥상위로 위풍당당하게 떠오르던 태양이 겨울이면 와불산 가리점 쪽 언덕 위로 주춤주춤 떠오른다, 마른나무 그림자 사이로. 소쿠리에 담긴 잘 익은 사과처럼 한입 베어 물고 싶을 만큼 색깔은 펄펄 붉은색인데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보인다. 한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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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거창 사는 후배 표선생과 점심 약속을 해서 보스코 점심상을 봐 놓고 집을 나섰다. 상림 숲 앞에 있는 '차씨화덕'이라는 식당에서 둘 다 파스타에 음료로는 커피를 마셨다. 이탈리아에서 푹 퍼지게 익힌 스파게티 국수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이나 좋아하고 본토인들은 질색인데, 이곳에서는 모두 이렇게 익혀준다, 이빨에 철떡철떡 붙을 만큼. 연장으로는 스푼과 포크를 주는데, 양식에서 나이프를 안 주다니 이상한 식당이다.


식사 후 상림을 걸었다. 잎이 다 떨어진 상림 숲에는 떨어진 갈잎들이 바람결에 달음질 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그 달음질에서 시인 단테는 날마다 황천으로 몰려가는 무수한 영혼들의 모습을 연상했다는데... 꽃이 지고서 돋아난 석산 잎들은 건강한 내년 여름의 꽃잎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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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생은 한신을 졸업하고 거창고등학교에서 34년간 교편을 잡았다. 모든 점에 건실하고 열심이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를 준다. '거창언론협동조합'이 내는, 이 지역의 유일한 진보언론 "한들신문"을 맡아 일으키기도 하고... 그미에게서 배운 학생들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거창읍이나 함양읍에서도 그미랑 걸으면 많은 사람에게서 "선생님, 안녕하세요!"라는 존경 어린 인사를 받는다. 


게다가 그미는 솔직하다. 내가 69학번인데, 76학번인 그미가 대학에 입학하니 어떤 선배의 희한한 가출과 결혼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더란다. 그러다 그 이상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기 함양에 살고 있다 해서 기대를 갖고 휴천재를 방문했단다. 선배는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남을 만한 여자로 보였는데, 백마탄 왕자님이라도 될 줄 알았던 남자를 보고는 너무 실망했단다. '너무 작은 키에 못생기고 (사실 내 눈에 보스코는 그래도 '귄있게' 생겼는데) 배까지 불룩 나와' 왜 저런 남자에게 반했을까 의아하더라나. "언니, 왜 그 남자에게 그렇게 빠졌어?" "내가 미쳤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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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미치지 않았으면 그런 짓 못하지 않는가?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내가 저 남자에게 아직도 미쳐 있다는 사실이다집에 돌아와서 그미에게 들은 대로 보스코에게 들려주니 '거, 맞는 말이네!란다. 우리 둘은 마주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그러고 보니 50년을 이렇게 미쳐서 살아왔다, 괴테의 말마따나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으리라." 믿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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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탄 왕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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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도정 체칠리아네 부부와 소담정 도메니카랑 오도재에 올라가서 삼봉산 임도(오도재에서 팔령재나 백장암까지 이어진다)를 걷기로 했다. 어제와 달리 구름 한 점 없다. 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하고 바람 한 점 없었다. 빵과 사과 커피로 간식을 챙기고 평지라 나는 조깅화를 신고, 보스코는 등산화를 신고 집을 나서다 혹시 몰라 다리를 보호하려 지팡이도 챙겼다. 어쩌면 다 나은 것 같던 다리도 갑자기 팍 꺾이기도 하고 스텝이 꼬여 넘어지려다 중심을 잡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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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이 일대에 귀촌한 교우들이 '지리산멧돼지'라는 모임으로 거의 매 주일에 한 번씩 산엘 다녔는데 그때는 왕복 6시간을 걸어 오도재에서 팔령재까지 세 시간, 왕복 여섯 시간을 걷기도 했다. 오늘은 그것의 반 왕복 3시간 걷고 나니 만 팔천보였다. 힘은 좀 들었어도 견딜 만 한 걸로 보아 내 무릎이 많이 낫기는 했다.


보스코가 흐트러짐 없이 잘 걷는 게 고맙다는 생각을 하는데, 두 여자가 "저렇게 걸으시는 걸 보면 완치되셨어요."라는 판정을 내려준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환자라는 생각 자체가 없고, 항암이나 방사선은 안 하겠으며, 그 병과 함께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시간만큼 (본인 말대로는 '막차 기차표' 끊어 놓았다) 행복하고 기쁘고 고맙게 살다가 떠날 거란다. 자기가 무슨 병을 갖고 있는지 모르고 살다가 떠나는 사람도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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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30분 읍내 '샤브향'에서 도서관이 후원하는, 느티나무독서회 송년 모임을 갖고 '콩고물'에 가서 이달에 읽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토론했다. 그 책을 통해 아주 쉽게 철학과 만날 수 있었고 룻소나 소크라테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고들 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고,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지식이 늘어나면 오히려 덜 지혜로워질 수도 있다." 나는 시몬느 보봐르의 "열 가지 늙어가는 법"을 다시 읽고 실천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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