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4일 목요일. 맑음
어제 먼 길을 내려와서 피곤할 것 같아 8시 반에 일어나자 했는데 모두 잠이 없고 부지런해서 4시가 넘자 다들 일어난다. 특히 긴 시집살이에 부지런함이 생활에 밴 큰딸은 아침기도를 끝내고 문상까지 산보를 한 바퀴 돌고서 들어선다. 아침에 막 구운 빵에 커피만으로도 함께 먹으면 꿀맛이다.
이엘리가 김장 거리를 뽑으러 왔다는 소식에 드물댁도 휴천재로 올라왔다. 엘리는 두 고랑의 무를 뽑아 차에 실었다. ‘올해는 무가 너무 커서 더 가져가라 해도 차에 실을 자리가 없다’고 푸념한다. 텃밭의 마지막 가을걷이 가지, 상추, 쑥갓, 파슬리, 루콜라도 뽑아주었다. 무어라도 풍성하게 나눌 넉넉함이 저 풍요로운 자연에서 나온다. 올해는 배추도 속이 꼭꼭 차고 갓도 밭으로 하나 가득하다.
이럴 땐 김장해 주는 요정도 밭에 몇 쯤 키우면 좋겠다. 점심은 ‘유림갈비’에서 우리와 드물댁한테 맛나게 사먹이고 ‘지리산버섯’에서 파지 버섯을 사들고 큰딸은 개선장군처럼 서울로 돌아갔다. 하룻밤 사이에 국토를 종단하여 오르내렸다고 자평할 만큼 활기찬 여자다.
며칠 전 트럭에 박혀 찢긴 아반테를 모시고 산청에 있는 현대 서비스에 수리를 부탁하고 돌아왔다. 막내아이한테 젖을 뗀 기분이다.
어제 이탈리아에서 부고가 왔다. 북쪽 알프스 지역 바싸노 델 그라빠에 살던 친구 델피노(Delfino Gastaldello: 한국 이름 갈葛 수사)씨가 지난 10월 1일 뇌졸증으로 하느님 나라로 떠나셨단다(92세). 그분의 부고장에 쓰인 "남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 살아있는 한, 아무도 죽지 않아요(Nessuno muore per davvero, finche vive nel cuore di chi resta)"라는 글귀가 아름다웠다.
1950년대 한국 전쟁 후 살레시오 평수사로 한국에 와서 가난하지만 밝고 긍정적이던 한국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다. 기숙사 학생들에게 목공을 가르치셨는데, 우리 둘째 준이 서방님도 그분 밑에서 목공을 배우며 고등학교를 다녔단다.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305608
사정이 있어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당신 말마따나 ‘천사요 엄마 같은’ 여인 안나와 결혼하고 고향에 살면서 고가구수리점을 차리고 계셨다. 80년대부터 우리가 알프스로 여름을 지내러 갈 적마다 그 집에 들렀고, 때로는 네 식구가 그 집에서 자기도 하였다.
많은 선교사들이 그렇듯이, 본의 아니게 귀국하게 된 그분은 저 먼 동양에 가난한 아이들을 버리고 왔다는 심한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리고 계셨다. 다행히 한국 살레시오 동문회에서 2000년 ‘아시아 동문회’를 서울에서 개최하면서 그 부부를 초대했고 50여년 전 당신이 가르치던 불쌍했던 아이들이 잘살고 있고 한국이 번영하고 있음을 자기 눈으로 보고서야 양심의 평화를 얻었노라고 고백하셨다.
2017년에 마지막으로 그 부부를 보았는데 그분은 고령으로 휠체어에 앉아 지내고 있었다. 미남으로 목소리 걸걸한 그분을 이 땅에서는 더이상 볼 수 없다. 빵고가 오늘 아침미사에 그분을 위해 위령미사를 올려주었다. 내가 이탈리아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김치를 서른 포기쯤 해도 우리 두 식구가 먹는 양은 일년내 다섯 포기도 못 된다. ‘김장 좀 적게 하라’고 노래를 하는 딸들이 있어 그렇게 해보려 하지만 아직 말처럼 안되는 걸 보면 아직도 내가 젊다는(?) 증거거나 아직 할 만한 기력이 있다는 뜻이겠다.
오늘 점심 후에 송전길을 걸었다. ‘죽은 이들을 사랑하는 계절’ 11월 위령성월에 로사리오를 하며 기억할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난다. 우리도 언젠가 누구의 로사리오에 한 알의 장미로 기억될 날이 올 테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따뜻한 추억을 되살아나기를 기대한다.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진이네 송전 집 입구에 서 있는 편백나무에서 두 가지를 잘라오고 유노인네 집에서는 골담초 열매 가지도 꺾어왔다. 다음 일요일이 대림 첫 주일이니 공소와 휴천재에 대림초를 장만해 보라색 초부터 켜야겠다. 편백나무로 환을 만들고 가운데 네 개의 초를 세운 다음 빨강 열매와 작은 포인세티아로 장식을 한 뒤 한 주에 한 개씩 어둠을 밝혀나가면 4주 후에는 즐거운 성탄이 온다. 지금의 한심스러운 시국에 하늘이 이 민족에게 어둠을 걷어내고 주님 탄생의 빛이 진정 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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