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922일 목요일. 맑음


그동안도 그리 육식을 즐기진 않았지만 이제는 지구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육식을 줄이자 생각하고 전날의 정전사건을 계기로 냉동실 안에 조각조각으로나 덩어리로 얼어있던 꽤 많은 양의 고기를 나무 밑에 깊이 파고 묻어주었다. 내가 사기도 하고 선물로 받은 고기를 나무들과 고루 나누어 먹었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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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두 식구는 고기를 먹는다 해도 100g 정도를 둘이 나누어 먹는 식성이다. 20여년 전 서울집을 고칠 때 공사를 위해 집을 비우고 한 달간 오빠네집에 머문 적이 있었다. 10시쯤 오빠가 딸(미선)에게 우리 저녁 간식 좀 할까?” 하더니 삼겹살 두어 근을 소금구이로 너끈히 먹어치우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주변에서도 특히 삼겹살을 엄청 많이 먹는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나 고기 좋아하는 사람들 식성은 채식을 위주로 하던 우리와 사뭇 다른 듯하다.


어제 수요일, 130분쯤 보스코 수술받은 최종 결과를 보러 가려는데, 새 차(아반테 하이브리드)가 완전 방전이 되어 문조차 열리지 않는다. 18년간 이런 사고를 한번도 친 일이 없던 소나타가 갑자기 생각났다. 가까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뜨거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분위기의 소나타가 떠나고 갓 스물 넘긴 꽃띠의 아리따운 아반떼가 들어와 얼굴값을 하고 앙탈을 시작하는 형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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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도 새 차가 방전되어 보험회사에 콜을 해서 접지선으로 충전을 했는데... 어제는 문조차 아예 안 열려 A/S 직원이 수동으로 문을 따고 배터리 표시를 누르니 차가 아우성을 쳤고 뒤이어 열쇠로 문을 열자 소리가 멈췄다. 번개같은 A/S에 진료에 늦지 않고 당도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수술 전후 보스코의 처지와 조직검사 결과를 주치의에게 듣는 날이라 몹시 긴장했다. 보스코를 아는 지인들도 겨드랑밑 임파선을 길게 뜯어냈다는 말에는 조직검사에서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며 소식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주치의는 화상을 보여주고 수술 후 어제 찍은 X레이를 지난번 사진과 비교해 보이면서 설명했다. ‘다행히 눈에 잘 띄는 폐 표피에 암이 자라고 있어 10cm 정도 길이로 폐 중간엽을 잘라 냈다.’ ‘두 개의 암조직을 뜯어내 조직을 검사한 결과 폐암 2.2기였다.’ ‘조직검사로도 임파선 전이는 없다고 나왔으므로 방사선이나 항암치료도 필요치 않다.’ ‘X레이 사진에 나오듯이 폐 아래에 물이 차 있으니 그 물이 없어지게 약을 처방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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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걸음으로 자주 걷고’, 앞으로 두 주간 심호흡을 연습하여 잘려나간 폐가 다시 자라게 노력하라면서 햇볕을 많이 쬐라는 충고도 받았다. 안도의 숨을 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둠 속에 위용을 자랑하는 백운대를 올려다보며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 서면서부터 유한한 생명이나마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신비감과 더불어, 삶의 발걸음을 이젠 좀 '싸묵싸묵' 걷자는 자연의 신호등을 절감했다.


오늘 목요일 아침 일찍부터 지리산에 내려갈 채비를 했다. 다리가 아파 치료를 받아야 차를 운전해 갈 수 있을 것 같아 병원에 들러 주사를 맞고 약 처방을 받았다. 보스코 약과 내 약을 합치면 약국을 차릴 만큼 분량이 많다. 어느 날엔가 이 모든 약봉지를 싹 치우고 친구를 맞듯 죽음을 기다릴 날도 오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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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5. ‘보스코가 데꼬들어온 딸미루네 부부가 아부이 수술하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은빛나래단을 모두 산청의 집에 초대해 잔치를 마련하고 "작은 돈보스코의 귀환"을 환영하는 현수막까지 세워 우리를 맞아주었다. 보스코는 걸게 차린 음식을 배불리 먹고 수술 후 입에도 안 대던 여러 과일까지도 귀요미가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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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0을 넘긴 세 동갑, 얼마 전 설암 3차 수술을 받은 남해 형부도, 뇌경색으로 고생하는 봉재언니도, 그리고 보스코도 새삼 깨달음을 얻은 몇 달이었다. 인생이 고해(苦海)에 떠서 파도에 흔들리는 조각배임을, 그리고 미루가 끌어가는 '은빛나래단'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통분모로 모이는 모임이어서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고마운 은총인가를 절감하게 된 한 해임을 번갈아 토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내일 추분을 맞는 계절이라 저녁 7시임에도 깜깜한 오밤중으로 휴천재에 도착했다. 거의 40일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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