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9일 화요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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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느티나무독서회 이번달 모임이 있는 날. 무더위 철이라 짧고 가벼운 시집이나 한 권 보자해서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선정했는데 좀 허전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박노해 도종환 김용택 안도현 정희성 그리고 수십년 읽어온 우이동 시인들’(이생진, 임보, 홍해리, 채희문)이어서 요즘 젊은이들과 느끼는 감성에 차이가 있는듯 하다


반달이 내려다 보는 지리산 골짜기에 밤이 깊이 드리워져 온 마을이, 정희성 시인의 시처럼, 저문 강에 삽을 씻고 거기 슬픔과 함께 고단한 하루를 씻어 흘려보낼 시간이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 ...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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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저녁 송전 가는 산봇길에 송문교 다리 난간에 기대어 군기 빠진 참깻단들이 쭉 양쪽으로 사열을 하고 있었다. 강바람에 말리자고 널어 놓은 깻단들이 느닷없는 소나기에 젖고 젖어 잎들은 찌는듯한 더위에 꺼멓게 떠서 썩어들고 나무 끝에 달린 깻송이는 덜 익어 파랗고 아랫것들은 너무 익어 하얗게 땅바닥에 참깨를 쏟아낸다. 저렇게 쏟아지고도 남은 깨알을 한 알 한 알 쓸어 담아 물에 씻어 일어서 다시 말려야 우리가 도회지에서 김치에 듬뿍듬뿍 퍼 넣는 참깨로 병에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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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네집 앞에 가동댁과 한동댁이 혀를 끌끌 차며 땅 꺼지게 한숨을 쉬면서 땅바닥에서 뭔가를 들춰내고 있었다. "울매나 정신이 없갔어, 요래 놔둘 여자가 아인데?" 비에 젖은 참깨단이 부직포에 덮여 있다. 비가 온다니까 부직포로 덮고는 해 날 때 널지도 못했나 보다.  연화동에 작년보다 더 많이 심은 고추가 30도가 넘는 더위에 '무작무작' 익어 매일 따야 한단다미친 여자 널뛰듯 바빠져 집안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새벽에 나갔는데, 오후엔 또 소나기가 온다는 일기예보다. "서방이 시상 버린 지 한 달, 혼자 사는데 질들라먼 당당 멀었다." 가동댁이 한 마디 입속말이 시샘 비슷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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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짐은 서방을 앞세운지 3, 40년 넘어 이제는 자기네 곁에 남편이 있던 벌나비 세월을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혼자 사는데 질든' 여자들이다. 그래서 자기들에겐 이젠 추억에도 없는 '과수댁 초년생활'을 떠올리며 구장마누래 한남댁을 측은히 여긴다. 두 사람 다 성한 몸이 아니면서도 자기 할 일을 미뤄 놓고 한남댁 깻단을 다듬는 모습이 아름답다. '서방없이 사는 게 죄인'이라며 마을회관에도 안 오고, 얼굴도 반쪽이 된 구장댁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한없이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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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뒤안 문상 마을로 올라가는 길가에 풀이 너무 자랐다. 여느 때 같으면 그 풀밭 가장자리로 구장네 논으로 가는 물호스가 있어 구장이 자기네 논둑 예초기를 돌리며 함께 깎아 주었는데 구장님이 갑자기 모든 인생이 가야 할 길을 떠나버리고 나니 나부터 당장 아쉽다, 그렇다고 한남댁에게 뭐라 할 수 없어 어제 새벽에 낫을 들고 풀을 캤다.


11일에는 서울을 가야 해서 텃밭을 갈고 멀칭을 해야 하는데...  오늘 새벽에 보스코랑 서너 시간 텃밭 단도리를 했다, 밭 가는 기계가 들어설 수 있게 준비했다. 밭 가는 일은 잉구에게 맡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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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잉구'가 오늘도 윗말에서 왼종일 예치기 돌리는 소리를 냈는데 저녁 8시가 넘어 어둑한 시간에 묵직한 트랙터를 몰고 내려왔다. 우리 밭을 갈고나자 어둠 속에 우리밭 바로 밑에 있는 한남댁 밭까지 갈아주고서 지친 몸으로 지친 기계를 끌고 올라간다. 이렇게 '혼자의 삶'에 익숙해질 때까지 온 마을이 한남댁에게 마음 써 주는 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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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는 스.선생부부와 마천 초입 마천석재석산 아래 골짜기로 물놀이를 갔다. 어젯밤과 오늘 서울 경기는 물난리가 크게 났다는데(작은아들이 사는 보라매공원 앞 살레시오 관구관 빌딩에도 물난리가 나서 빵고가 새벽까지 물을 퍼내야 했단다) 이곳 함양 지리산골짜기는 어제 오늘 비 한 방울 안 내리고 지나갔다. 기후변화가 세계 어디서든 국지성으로 난리를 몰고 온다.


스.선생네 손주들이 오면 늘 데려간다는 너럭바위 주위로는 물웅덩이가 제법 넓었다. 피라미와 고동이 노는 맑은 물에 다리만 적시고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 물놀이를 한 셈이다. 보스코는 수영 팬티까지 갈아입고서 온몸을 다 물에 담갔으니 우리 중에 나이가 제일 많으면서도 제일 어린이다운 태도가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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