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726일 화요일. 맑음


지리산에서는 공기가 맑고 좋아 잠을 적게 자도 맑은 머리로 일찍 깬다. 그렇다고 피곤하거나 잠이 부족하지도 않다. 습관적으로 벌떡 일어나 일복으로 갈아입고 눈에 제일 먼저 띈 일을 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보통 9시까지 아침 일을 하니 반나절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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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구름이 절묘한 그림인데 그동안 비가 들이치거나 날벌레 하루살이떼가 불켜진 실내가 그리워 밤을 새느라 유리창에 몸자국을 남겨 얼룩져 있다. ‘오늘은 저거다!’ 해 뜨기 전 아직 서늘한 시간이니 대야에 세제를 풀고 창닦이, 걸레, 유리 세정제, 신문지를 챙겨 테라스로 나가 이층을 밖으로 한 바퀴 돈다. 창문이 깨끗하면 세상이 깨끗하다! 부시시 늦게 일어난 보스코는 유리창 깨끗한데 왜 또 닦느냐?’고 지청구다. 그의 눈에는 집안도 유리창도 늘 깨끗하단다. ‘당신이 잠든 사이 우렁각시가 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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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배밭에 내 원피스가 세 개나 내걸리고 독수리가 두 마리나 배밭 위를 빙빙 나는데도 마악 익기 시작한 배를 쪼아먹느라 물까치가 족히 열 마리는 배밭을 드나들며 소란스럽다. 보다 못해 내가 테라스에서 양푼을 두드리면 우르르 날아갔다가 1분 후면 한 마리씩 다시 돌아와 자리를 채운다


보스코가 배봉지를 싸면서 눈에 안 뜨여 남겨둔 배들이 단 맛을 풍기기 시작하니 새들이 아마 이건 우리 몫인가벼하고 오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봉지에 싼 배에서 단맛이 풍기면 일제히 봉지를 쪼기 시작할 테고 그리 되면 올해 배농사는 끝장.


방조망을 사다 배나무들을 모조리 씌우거나 봉지 못 싼 채 남겨진 배를 따버리자고 보스코를 졸랐더니 오늘 새벽에 배나무 밭에서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안 싼 배를 모조리 따버렸다. '사람들 참 인색하다'고 새들한테 욕먹겠다.  제법 맛이 들기 시작해서 까먹어 보니 먹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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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름에서도 제일 더운 날이라는 중복. 미루네 식구랑 냉면이라도 먹자고 유림에서 점심 번개를 쳤다. 안셀모와 김부장까지 와서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자리는 언제라도 기분 좋다. 아침에 배 따러 나갔다 양쪽 볼을 깔따구에게 물려 알밤 두 개를 문 다람쥐 얼굴을 하고서도 보스코가 데꼬 들어온 딸미루를 보고 좋아하는 표정이라니! 서울 가면 세 딸’, 지리산 오면 셋째딸이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줘 우리 두 노친의 삶이 얼마나 풍족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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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시아 시우는 오전엔 삼촌을 찾아갔다 돈까스를 얻어먹고, 저녁엔 큰외삼촌에게 회전초밥을 먹고 싶다 했다 실컷 먹으라는 외삼촌 말에 시아 혼자 무려 열아홉 접시를 먹었다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고딩1이 되니 한참 먹을 나이라지만 사진을 본 할미로서는 사돈에게 미안했다. 이 할머니의 주머니 사정을 봐서 내게는 겨우 탕수육에 짜장면이 주문한 것 전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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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늦게 드물댁이 찾아왔다. 자기는 글도 모르고 전화 걸 줄도 모르니 면사무소 노인 일자리담당자한테 언제부터 작업하는지 알아봐 달란다.  81일부터라니까 그날이 언제인지 모른단다. ‘함양성당 문정공소뒷집에 사니까 공소에 사람들이 주일 예배 드리러 아침에 나오는 게 보이면 '그날 한 밤 자고 이튿날이 월요일이고 일 가는 날'이라고 설명했다. 


글을 몰라 대구나 서울 사는 딸네 아파트촌에도 못 찾아가는 동네 아짐들이 꽤 있다. 우리 대사관저 식간에 있던 마리아 아줌마는 알파벳을 몰라도 버스 숫자를 보고, 집이 생긴 모양을 눈에 익혀 길을 식별하여 로마 관광을 혼자서도 곧잘 다녔는데(그래서 그미는 지하철은 절대 안 탔다, 어디서 타고 내릴 줄을 알 길이 없어서)... 문제는 이 마을 아줌마들도 마리아 아줌마도 내가 글을 가르쳐 주겠다면 질색을 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지만 글 배우는 일 또한 새삼 일종의 모험이라서 '몰라도 살만하다'는 것인지 모두들 씩씩하게 잘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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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나절에도 깔따구떼한테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드물댁이랑 텃밭에 루콜라, 열무, 얼갈이배추, 쑥갓, 상추씨를 뿌렸다같은 시각에 보스코도 오늘 사 들고 들어온 독수리 두 마리를 배밭에 더 설치했다아무튼 나무에 남겨준 배알을 모조리 따버렸고 독수리가 두 마리나 더 경비를 서자 오늘 저녁나절은 배밭은 유난히 조용했다. 


네 마리 독수리가 창공을 지키고 모자 쓴 빨강 원피스의 여인 셋이 대롱대롱 배나무에 매달려 치마를 흔들어대는 데도 우리 배밭을 아직도 감히 넘보는 물까치라면, 우리 배 나눠 먹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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