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21일 화요일. 하지(夏至). 구름 많음


작년 가을에 김원장님 어머님이 굵은 마늘 한 접을 주셨다. 그 집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농작물이 마늘일 수 있겠다. 우리집도 마늘 농사를 지었지만 알이 작고 소출이 적어 한두 접은 더 사들이려던 참이어서 염치 좋게 넙쩍 받아왔다. 내심 워낙 알이 좋아 종자로 쓸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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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늦가을 마늘을 심을 때 드물댁도 종자가 좋아 잘 되겠다고 치하도 했다. 아무튼 작년 겨울, 우리 밭 소출 중에서도 굵은 것도 골라 한 접 반이 좀 더 되게 심었다그런데 금년 수확을 하고 보니 작황은 흉년이었고 엄지 만한 종자를 한 쪽 심은 자리에 새끼손가락 만한 새끼가 여섯 쪽씩 매달려 나도 마늘이에여라며 족보에 올려달란다. 우리 없는 새에 마늘을 거두어 드물댁이 대강 엮어 매단 마늘 단을 다시 풀어 50개씩 묶었다. 보스코가 정자의 대나무 선반에 걸쳐놓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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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낮 더위가 장난이 아니다. 아직 해님이 기지개를 켤 무렵에 테라스 식탁에 식탁보를 깔고 3일 전부터 말린 순서대로 민트를 작두로 자른다. 내가 수술한 손가락이 있는 오른손을 쓰는 걸 보다 못해 보스코가 자기가 좀 잘라보겠단다. 그런데 그가 하는 건 썰어내는 게 아니고 쥐어뜯는 형국이다. 남이 쉬이 한다고 쉬이 덤빌 일이 아니다. 이 일은 노하우가 필요하고 10년쯤 했으면 손에 익을 때도 될 법한데 작두 날이 별로고 가위는 더욱 쓸 처지가 못 되니... 보스코는 해보다 안 되자 "나는 아침밥상이나 차려야겠다."고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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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벌들의 날개짓 소리가 휴천재 공중을 메운다. 10여년전에 비해서 현저하게 줄어든 벌소리이지만, 텃밭 옥수수가 하얀 꽃술을 올리고 수수꽃을 피우자 벌떼가 모여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벌의 뒷다리 양편에 노랑 구슬이 들려 있다. 옥수수 꽃가루를 동그랗게 굴려 양발에 매달고 날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앙증맞다. 다만 인간들의 영악함이 대자연의 탄식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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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벌들이 꽃가루를 뭉뚱그려 달고 벌집에 가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촘촘한 철망을 벌집 입구에 매달아 벌들을 몸수색하여 꽃가루를 떨구게 만든다. 영화 집시의 시간에서 앵벌이 시킨 아이들이 귀가하면 수금을 하는 '왕초'가 의심가는 앵벌이를 의자 위나 쇠그물 위에서 뛰게 하여 주머니 어느 구석에 삥땅해둔 동전을 털어내는 수법을 연상시킨다. 양봉업자들이 화분을 건강식품이라며 비싸게 팔아 돈을 번다


그렇게 모아온 꿀은 인간에게 빼앗기고 설탕물만 먹고 겨울을 나고 애벌레들을 먹여 키우는 꽃가루마저 인간의 무병장수를 위해 수탈당하니 지구상의 벌이 전체적으로 약해져서 그 개체수가 절반으로 줄었고 우리가 사는 지리산 일대에서는  토종벌이 전멸한지 10년이 넘는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가 사라지리라.”(아인슈타인)는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집시의 시간>(에밀 쿠스트리차 1989)의 장면: 앵벌이들의 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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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담정 도메니카가 작년에 산행길에 넘어져 부러졌던 팔목이 도져서 여간 고생을 하는데 하지가 왔는데도 하지감자를 못 캐서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천사는 도처에 숨어 있는 법. 도정 스.선생 부부가 어제 새벽 6시에 내려와 10시까지 감자를 함께 캐 주었단다. 셋이서 4시간 한 노동이니 12시간을 캔 셈이고 소담정 혼자 캤으면 하루 종일 캤겠다


일이 끝나고 지칠대로 지친 일행이 우리 집으로 올라와서 냉커피에 간식을 했다. 이웃이 있어 품앗이가 가능하고 시골 삶에 의지가 된다. 우리가 간식을 제공했다고 우리 부부도 소담정에게 초대받아 유림에 새로 연 식당에서 시원한 냉면을 얻어 먹었다.


텃밭에만 내려가면 가지, 오이, 토마토가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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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댁 말대로 대밭에 갔더니 죽순이 적당한 크기로 자라 올랐다. 낫으로 한 소쿠리 잘라다 주며 드물댁더러 껍질을 벗겨 가마솥에 삶아달라 부탁했다. 오른손, 그것도 엄지손가락이 싸매져 있으니 내가 스스로 못하는 일이 한둘 아니다. 지난 겨울에 우리집 배나무 전지한 가지들이 드물댁 가마솥 아궁이에서 빨간 불길을 일으키며 탁탁소리를 낸다. 내가 배화교(拜火敎) 신도가 아니어도 붉게 넘실거리는 불꽃을 보면 그 손짓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간다.


어제 해질녘 김원장님과 문섐 부부가 휴천재에 오셨다. 휴천재에선 빗방울 하나 지지 않았는데 임실에서 인월까진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폭우가 내렸단다. 보스코의 건강도 궁금하고 내 엄지손가락의 상태에도 마음이 안 놓였나 보다. 우리 부부 노년에 이르러 이토록 가까이서 보살펴주는 부부 인의(仁醫)를 만나다니 이처럼 큰 복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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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차가 침대 위에 펼쳐진 식탁보 위에서 마르며 찾아갈 주인들을 기다린다. 이 불편한 손으로 정성을 드렸으니 다른 때보다 더 향기롭기를 기대한다. 오늘 저녁 나절에는 감자를 골라 담고 휴천재 위아래 쓰레기를 분리하고 보스코가 잘라 놓은 풀과 나뭇가지 태웠다. 장마철을 앞두고 산골의 날들은 한가로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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