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612일 일요일. 흐림


서울서 내려와 제일 먼저 구장네 문상을 가려는데, 구장댁을 만날 수가 없다. 하기야 그많은 논일을 벌려 놓고 (부엌에 눕혀놓은 부지깽이마저 일어나 겅중거리고 뛰어야 할 만큼 바쁜 계절이다) 갑자기 떠나버린 지아비의 자리를 아낙 혼자서 거둬야 하니 오죽 바쁘겠는가! 그래도 연화동 논들은 우리 천사잉구가 맡아 짓기로 했고, 송전에 있는 논은 염씨가 거두겠다고 했다니 절반은 남들에게 소작으로 넘겼지만, 그 나머지도 남들 땅의 몇 배가 된다.


낮에 몇 번 찾아 갔다가 못 만나고, 어제 저녁 산보를 마치고 돌아오다 들렀더니 깜깜한 들녘에서 돌아오는 그미를 문간에서 만났다. 반갑고도 서글퍼 덜컥 그미를 안았더니 와락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 땀내가 너무 나요라면서 부끄럼을 탄다. 그날의 사연이야 낮에 찾아오던 길에서 만났던 화산댁에게 들은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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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 네 시에 구장이 각시를 깨워 오늘 모심을라면 바쁠 테니 어여 국밥을 끓이라했단다. 둘이서 한 그릇씩 먹고 나니 다섯시. 품꾼도 있어 참이랑, 점심 먹을 찬이라도 두어가지 만들어 놓고서 논에 가겠다니까 못자리에 빨리 올라가 모판 꺼내 물 빼놓지 않구!’라고 소락데기를 지르더란다. 구장도 간밤에 깜깜할 때까지 물 뺀 모판을 연화동과 송전으로 실어 나르고 윗논(휴천재 바로 옆)에 심을 모판을 각시더러 못자리에서 꺼내 놓으라고, 그러면 자기가 곧 올라간다 했다.


새벽 6시쯤 이웃하는 구장댁 개 두 마리와 화산댁 못난이 개 두 마리가 갑자기 얼마나 사납게 짖어대는지 화산댁이 무슨 일인가 내다보았단다. 119 아저씨가 마당에 들어서며 이웃집에서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는데 환자 외에는 아무도 없어 그 집 식구들 전화 아느냐 묻더란다. 아는 게 없어 서성이는데 새벽 첫차로 읍내로 일 나가던 기욱이엄마가 윗논 못자리에 구장댁 있던데.’라고 일러주더란다. 이웃 사는 구장댁 사촌오빠가 뛰어 올라가 그미를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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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대원들이 구장을 집에서 들것에 실어 내오는데, 화산댁 눈에 헤쳐진 옷섶으로 나온 배가 남산 맹크롬 높았고 허연 얼굴이 이미 이녘 시상 사람이 아니드만.” 그러니까 본인이 신고하고 구급차 도착하고 가족을 찾고 하는 새에 이미 저 세상으로 발을 옮긴 참이었다. “사람 죽을라카면 잠깐인데, 허망하드만. 어째 천년만년 살 것처럼 그렇게 일 욕심을 냈을까이!” 동네에 살아남은 7, 80대 남정이 몇 안 되고 남편 앞세운 아낙들에게 은근히 의지처가 되던 구장의 급작스런 초상을 치르고 동네 아줌마들은 대부분 멘붕 상태다.


요즘은 날이 더워 저녁에 윗동네로 산보를 하며 보스코랑 로사리오를 바치는데 엊저녁에는 영이네 집근처에 인기척이 보였다. 혹시 그 윗집에 사는 윤교장님인가 해서 다가가 보았더니 영이 삼촌이었다. 이웃 살던 교장선생님은 초봄에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평생 농아학교에서 일하셨고 가족은 미국에 보내고 혼자 남아 지리산으로 내려온 분인데 우리와 소원했던 세월에 그만 생사의 작별 인사도 없이 허망하게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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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할머니가 나오더니 내 손을 덥썩 잡고 구장 얘기를 하며 작년에 가신 당신 남편이 새록새록 더 보고자파지고 사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서 남의 설움에 내 설움까지 얹어 줄줄 눈물을 흘린다. 동네가 전부 과수댁들인데 남편 끼고 산보를 나선 내 죄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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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토요일에는 드물댁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 텃밭 감자를 캤다. 남들은 올해 망한 감자 농사라도 이미 다 캤는데 자기랑 함께 심은 우리 감자 이랑의 속사정이 궁금해서 우리집에 서너 번을 오르내렸다. 보스코가 배봉지 싸기 전 마지막 소독을 하는 사이 드물댁은 감자를 캐고 나는 주워 담았다. 지나가다 내 손 수술을 걱정해온 잉구씨도 트럭을 세우고 내려와 두어 고랑 캐주었다. ‘다른 집보단 알도 굵고 개수도 많다는 잉구씨 말에 나도 드물댁도 그나마 기분이 좋았다.가끔 폭 썩은 감자를 내게 보이면서 드물댁이 '여기 홍시 들었구만 어여 드셔!'라고 나를 놀리기도 한다. 씨감자 한 상자 심어 여덟 상자 캤으니 평년의 절반이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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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라 본당으로 미사를 갔다. 공소식구들이 모조리 대처에 나가고 없어 공소 예절 없다는 문자가 떴다. 일요일에도 장날이면 읍내 병원들이 문을 열므로 수술한 내 손가락 실밥도 뽑을 겸 읍내에 나갔는데 코로나 이후로 장날도 일요일엔 병원이 닫는단다. 


본당신부님도 삼위일체를 신비 중의 신비’라면서 한참이나 설명을 하셨는데 아무래도 못 알아듣겠다. 그리스도교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재작년 가톨릭학술상까지 받은 보스코도 못 알아듣기로는 마찬가지라면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혼자가 아니다라는 설명이 그 중 났단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 담에도 두고두고 공부할 신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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