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31일 화요일. 맑음


월요일. 아침 일찍 퇴원할 준비를 했다. 쓰다 남은 비누 치약 티슈 과일들을 남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읽은 책(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 우리 마산교구 배기현 주교님이 쓰신 늙은 아버지와 고독 아들, 김영하 작가가 5월에 낸 따끈따끈한 최신작 작별 인사, 오랜만에 소식을 알게 된 동양화가 손정숙이 수필가로 쓴 샛강의 파랑새에게)을 주섬주섬 가방에 담는다. 가져온 책을 다 읽었다니 어제는 빵기가 카프카의 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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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좀 아파서 그렇지 해주는 밥 먹고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진짜 휴가! 코로나여서 아무도 병실 면회가 안 되니 이건 보너스다. 집에 가자니까 좀 아쉬워 기왕 휴가면 한 일주일 정도였으면 좋았겠다싶다가 그래 3박 4일이 딱 좋아라고 만족하기로 맘먹는다. 휴가라면서 휴가 시간을 병원에 입원해서 보냈지만.... 그러고 보니 결혼생활 50년에 나 혼자만의 휴가를 단 하루도 보낸 적이 없었다. ‘다른 여자들도 다 이럴까?’ 약간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려다 큰아들이 퇴원하는 엄마를 데리러 왔다는 전화에 잡생각을 접었다.

집에 오니 엄마 떨어졌던 젖먹이처럼 보스코가 엄청 반긴다. 빵기는 점심 약속이 있다고 나가고 보스코가 점심상(생전 처음)을 차려준다. 입원하던 날 아들들이 시켜 먹었던 깐쇼새우 남긴 것 한 마리, 군만두 남긴 것 세 개, 그 전날 내가 차려주었던 김치 볶음밥 남은 것 한 숫갈을 접시 하나에 올려놓고 렌지에 돌려서 내놓는다. ‘나 주려고 일부러 남겼나?’ 싶어 기특한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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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지난 금요일 점심, 빵기의 생일이라고 내가 끓여준 미역국 남은 것에 내가 앉히고 간 밥 남은 것을 몽땅 넣고 푹푹 끓여 (끼니마다 물을 반 공기씩 더 넣었다나?) 점심마다 먹었다 더니 오늘 점심에도 나머지를 마저 내놓았다. 미음이 다 되어 있었다!

아아, 아내의 34일 휴가가, 그것도 아내의 병원 입원이 이 남자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깊이 생각케 한다. ‘그는 정말 나하고 많이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구나!’ 싶다. 아내의 며칠 병원 입원에 저 남자가 대처하는 방법, 멀쩡한 밥과 미역국을 미음으로 만들어 아내의 마음에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뭉게구름처럼 일게 만드는 게 그가 살아남는 재주라면 재준가? ‘하지만 어쩌랴, 그래서 부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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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들어가니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나무 발판 아래로 숨는다. 왼손으로는 발판을 들고(오른손은 수술했으니 사용 가능한 공격 무기는 발밖에 없었다) 급한 대로 발로 벌레를 짓밟고 샤워장에서 발을 박박 씻으면서 바퀴벌레 시체는 하수구로 흘려 보냈다. 보스코라면? “여보, 여기 바퀴가 있는데?”라고 나한테 일러바치거나, “! 바퀴, 빨리 도망가! 우리 마누라 보면 넌 죽는다.”라며 벌레를 도망 시켰을 게다.


오늘 아침 일찍 상처를 소독하러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에 돌아갔다, 거즈를 풀자 손가락이 벌겋게 성이 나 있었고 통증도 돌아왔다. 원장님은 걱정이 되는 듯 '아무래도 다음 주까지는 서울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경과를 봅시다' 하며 소염제 주사를 놓았다. '휴천재 텃밭 감자도 캐야 하고, 배나무 배도 솎고 봉지도 싸야 하는데... 주말에는 손님도 맞아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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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바쁘고 손은 뜻대로 안 돼 갈팡질팡하는데, 오늘 오후에 한목사와 큰딸 이엘리가 단체 위문을 왔다. 내 사정을 듣고는 큰딸이 '아부이' 보스코를 설득하여 교통 정리를 했다, 큰아들까지 합세해서.


감자나 배가 문제가 아니고 평생 써야 할 손을 먼저 돌봐야 한다

내일 '작은자매회' 창설자 푸코 성인의 시성축하식에는 기차로 내려가 이엘리의 차량으로 수녀님들을 방문한다

68일 엄마 첫 제사에 유무상통에 내려가 제사를 드리고서 지리산에 내려간다

64일 휴천재를 방문키로 약속한 한길사 사장님께는 양해를 구한다

65, 딸들의 우사방 모임을 부평에서 갖고 보스코와 조서방도 참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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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욕심대로 하다 보면 순리를 벗어나는 법! 우리 동네 아래숯꾸지’ 구장님의 급작스런 죽음에서 새삼 깨달았다. 그 동네만 해도 여자들은 마치 태어나면서 부터 과부였던 아짐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스물댓 가구에 남편 있는 여자가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는다. 어느 새 보스코가 그 동네 최고령 (남자) 어르신이 되어 있다. ‘살아만 있어주면 업고 다닐 텐데!’라던 거문굴댁의 간절한 사부곡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한 손을 못 쓰니 오늘 아침 보스코가 내 생머리를 땋아서 묶어 줬다. 거울로 비춰보고 웃으면서도 아내가 딸도 못 낳아준여든 살 남자의 솜씨 치고는 그럴 듯하다고 자위해야 했다. (그러니 노년에 이르러 다 큰 딸이 넷이나 생긴 이 행운은 얼마나 대단한 복인가!)


남편에게 땋인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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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우리에게 은인이기도 한 벨기에 선교사 윤선규(Luc Van Looy) 주교님이 추기경으로 서임된다는 반가운 소식! 1960년대 그분의 청춘 시절에 벨기에서 한국으로 선교사로 와서 20여 년을 보냈고, 한국 관구장을 지낸 뒤 살레시오 수도회 최고평의원과 부총장으로 로마에서 20여 년을 보냈고, 당신의 고향 벨기에 겐트 교구장으로 20여 년을 지내고서 작년에 은퇴한 분이다


2004년에 보스코랑 그분의 교구장 착좌식에 벨기에를 찾아갔다 돌아오면서 보스코가 나에게 저분은 언젠가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봉직할 분이다!”라고 하던 말이 적중되었다


2011년 빵고 서품식을 집전하러 오신 윤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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