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22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5월 20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서울 가져갈 물건들을 챙긴다. 갈 때는 번잡스럽도록 많은데 실상 가져가서 누군가에게 주려다 보면 보잘것없어 받는 사람들에게 되레 미안하다. 그래서 시골 엄마들은 그중 가장 나은 것으로 골라서 자식들에게 보내니 실상 자기가 먹으려다 보면 찌지레기가 전부다.

그런데 그것이라도 받아 고맙고 반가워하는 자식이라면 만점 짜리 효도다. 그렇지 못한 자녀 일수록 핀잔이 대답이다.  "엄마 별것도 아닌 거 보내지마! 사먹는 게 싸!" "제발 농사 짓지 말라고! 맨날 허리 아프다 다리 아프다 하는 소리 듣기도 이젠 지겨워!"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미는 기역자로 꺾인 허리로 여전히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잔뜩 주눅이 들어서 자식 며느리 눈치 보며 그 소출을 또 보낸다, 속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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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미루네서 저녁을 먹다가 임플란트한 이가 툭 떨어졌다. 금요일 서울에 올라오는 길이어서 다행이지 이 하나 붙이려고 서울행을 해야 한다면 산속에서 산다는 게 암담할 게다. 로마에 살 적에 밥을 먹다 틀니 고리가 부러졌다. 새로 하려고 이탈리아인 치과에 가서 물어보니 한국행 왕복비행기 값을 지불하고도 한국에서의 치료비가 싸서 그야말로 '틀니를 새로 하러' 한국으로 온 기억이 있다. 아무튼 오후 2시 반 예약에 맞추어 난곡 우정치과에 도착해서 임플란트를 다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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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다섯 시에는 회의차 귀국하는 빵기의 정기검진을 위해 대장내시경을 준비하는 약을 타러 보스코가 서울봄병원에 갔다. 약 먹는 방법을 설명하는 간호사가 노교수님을 옆에 앉히고 시골 치매 할아버지께 하듯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하고 또 하는지 그 열성에 웃음을 참기가 힘들더란다.


하기야 어제도 샤워실 물비누를 손에 들고 "여보, 핸드 워시가 손 닦는 거야?" 하고 묻는 보스코! (영어, 이탈리아어, 라틴어에서 100여권의 책을 번역 출판한 번역작가의 질문이라니!). ", ‘핸드이고 워시‘씻는다니까 손 씻는 물비누란 뜻이예요." 라고 나도 친절히 대답해줬다. 보스코 실생활 감각이 그런 수준이어서 저 간호사 언행에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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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엔 하루 종일 서울집 정원 손질을 했다. 보스코는 흰가루병에 걸린 장미에 소독약을 치고, 사다리를 놓고 능소화 죽은 가지를 잘라냈다. 나는 집안 가득 자라난 맥문동, 윤판나물, 은방울꽃, 둥굴레, 원추리, 큰취 등을 솎아내고 지리산에서 가져온 꽃과 채소 모종(고추, 상추, 토마토, 오이)을 심었다

작년 해거리와 달리 단감나무도 금년엔 감꽃을 가득 피웠다. 돈 놓고 돈 먹기 조합형 개발사업을 벌일 정권이 등장하자 주민 누구도 거주권을 소외시키지 않겠다던 우리 동네 30380 도시개발 주택사업이 완전히 멈추었다. 덕분에라도 저 단감 따먹게 그냥 올해를 넘기면 좋겠다.

남호리 밭을 토요일에 경모씨가 예초기로 깨끗이 다듬었다고 연락해 왔다. 신선초밭을 내가 호미로 깔끔하게 지심 맨 솜씨에 놀랐다는 칭찬도 보탰다. 네 자녀를 데리고 귀농하여 본인은 산림청의 임시 고용직으로, 아내는 읍내에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자녀들을 얼마나 예의 바르게 키우는지 모두의 경탄을 자아내는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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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9시에 빵기가 스위스에서 도착했다. 코로나로 2년 반 만의 귀국이다. 반가움에 내 가슴은 울컥하는데, 피난민 살림처럼 어깨에도 커다란 배낭을 메고 커다란 이민가방 셋을 밀고 끌고 진땀 빼는 아범의 모습이 사선을 넘는 피난길이 따로 없다

"짐 좀 적게 갖고 다니지 그러냐?" 하면서도 지리산과 서울 오가는 소나타에만도 트렁크와 뒷좌석에 빈틈없이 짐을 채우는 이 어미가 할 말은 아닌 듯하다. 어쩌다 짐꾸리기 고생과 요령에 대한 조언이라도 하면 "엄마 내가 짐싸기 박사학위가 있다면 벌써 몇 개는 받았을 겁니다."라고 내 입을 막는다. 그 대신 보스코는 지난 50년간 국내 국외 이사와 여행 십수차례 이삿짐 싸기에 일체 손을 놓고 '나 몰라라'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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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에는 달포 만에 우이성당으로 미사를 갔고 입구에서 혜선엄마, 엘리사벳, 베로니카, 마을 통장... 반가운 얼굴들이 두 팔 벌려 나를 맞는다. 아마 천국에서도 저 얼굴들을 여기서처럼 만날 게다. 신부님은 요즘 정권 교체로 부글거리는 우리 마음을 아시는지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예수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마음에 받아들이라 설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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