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512일 목요일. 흐림


두 주간 연달아 서울 가기가 힘들 텐데 보스코의 발걸음은 가볍다. 반가운 사람들 보고, 단상에 올라 하고 싶은 얘기하고(제목이 "에로스의 영성"이란다), 책상 앞의 숨 막히는(?) 번역에서도 좀 벗어나니 또한 나쁘지 않겠다. 정동에서 그를 기다리던 큰딸 엘리는 보스코를 만나 오신부님과 함께 넷이 점심을 먹고, 그의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고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고 자랑이다. 대낮에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활기차게 걷는 모습에 자신도 힘을 받아 그 중 하나가 되었다며 아주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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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도 젊고 예쁘고 상냥한 딸과 에로틱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고 자랑이다. 나 역시 안심하고 보스코를 이엘리에게 맡긴 터라 고맙다. 그를 알아본 누군가가 '성교수도 일났다'며 내 걱정을 한다면  '거봐요, 내 남편 에로스 이 정도라구요!' 어깨를 으쓱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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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20분 버스로 보스코가 떠난 후 그의 고장난 컴퓨터를 맡긴 '컴천지'에 갔다. 바탕화면에 너무 많은 게 깔려있고 너무 많은 내용을 C드라브에 넣어두니 과부화가 걸려 있어 용량이 큰 D드라이브를 하나 더 설치했단다. 수리비 15만원을 먹었다


경비를 걱정하는 보스코더러 '힘든 몸으로 외국인 아내와 세 딸 건사하느라 고생하는' 컴사장과 생활비를 나눠 쓴다고 생각하고 주기적으로 컴퓨터를 고장 내라고 격려할 참이다. 우크라이나가 고향이라는 색시도 나라 걱정, 가족 걱정에 얼굴이 어둡다. 그곳에 있으면 모두 함께 당하며 함께 싸우고 함께 체념하겠지만 멀리 떠나 있어 고향 생각에 마음이 더 쓰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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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20년 전 쯤 산 전기 테스터를 주면서 나더러 시내 전파사에 가서 사용방법을 배워오라 했다. 함양에서는 드물게 친절한 가게 '중앙전업사'에 갔더니 멋쟁이 여주인도 사용법을 모른단다. 마침 남편이 전기공사판에서 돌아왔다. 바쁜 사람 같아서 아주 외교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역시 남자들은 여자의 웃음에 약하다


전파사 사장도 모르겠다면서 구석기 시대의 역사를 간직한 듯한 늙은 할배 전공 한 분을 불러 세워 "할배, 요거 할배 때 쓰던 거제? 좀 갈켜 드리소." 부탁한다. 전기 재료를 사러 왔던 그 노인에게 내가 "배움을 사사하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라고 허리를 꺾고 인사를 드렸더니 "서방은 뭐하고?" 묻는다. "이런 사소한 일은 저같은 아낙이 하고 그분은 나라를 구하십니다." 라는 내 능청에 할배는 측은하다는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다가 테스터 눈금들 읽는 법을 일러주는데 내가 그런대로 알아듣자 "제법 하네!" 라는 칭찬도 했다. 그 말이 경상도 남자가 여자에게 내리는 최고의 칭찬이자 경의임을 알기에 "네, 싸부님,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허리를 깊이 조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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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에서 김밥 일곱 줄을 사 들고 미루에게 갔다. 김이사, 안셀모, 봉재 언니, 우리 둘의 점심 모이. 임신부님이 산티아고로 45일간 여행을 떠나고서 하루에도 열 번씩 '동생이 언제 오나?' 미루에게 물어오는 언니를 위해 (보스코 베이비시터를 쉬는 날이어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언니를 모시고 오는 길에 뭐가 제일 힘드냐고 물으니, "운전을 못하는 것, 그래서 가고 싶은 곳을 못 가는 게 제일 힘들어요." 했다. 내가 요즘 운전하기 싫다고 꾀를 좀 부리는 참인데 이래선 안 되겠다. 내 맘대로 돌아다닌다는 것만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잃고 나서야 배우는 일은 한참 모자라고 또 때늦은 탄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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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루 매장에서 김밥을 먹고 산청 천하태평 장미농원이란 곳으로 장미 전시회에 갔다. 전시회라기엔 좀 아쉬운 농원인데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러나 2년간 키운 장미가 병에 걸려 걱정하던 미루가 치료를 물어보자 '나 바쁜 것 안 보이냐?'는 식의 여주인의 불친절에 장미는 빛을 잃고 또 보러 오고 싶다는 흥미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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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요' 싸부님 카페에 들러 팥빙수를 나눠 먹고는 언니는 거창 동생과 입석리로, 미루는 삶의 현장으로, 난 집으로 돌아와 두 시간 동안 줌 화상통화로 경계를 넘는 한인들을 공부했다. 9시 읍으로 나가 서울서 행복으로 빵빵해져 돌아온 보스코를 픽업하고 나니 그 날 임무 끝.


오늘 저녁 2년여 만에 '느티나무독서회' 모임을 읍내에서 가졌다함양의 고마운 추억이다. 그간의 공백에 대부분 떠나고 남은 사람 넷과 새로 오는 사람 둘이 오붓이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함양의 지성인 여성들이 10년 넘게 가꿔온 느티나무가 잘려나가지 않는 한 그늘이 그리운 이들이 돌아와 주길 기다리는 마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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