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10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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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성모님의 달이고 성모님의 꽃인 장미가 한창 만개하는 시절이다. 휴천재 울타리는 집이 처음 지어졌을 때 제일 흔하고 강한 성질의 빨강장미가 피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본 사계성 코스모스 장미에 반해 다섯 그루를 구해다 빨강 장미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심었다. 그러나 세 그루는 죽고 두 그루만 남아 먼저 빨강 장미를 심었던 진이아빠가 괜한 짓을 했다고 볼멘 소리를 했었다. 요즘 휴천재 뜰은 늦게 핀 철쭉 두 그루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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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인가, 여수 사는 양선생님이 분홍 꼬마 넝쿨장미를 가져다 심어주셔서 그 정성을 알았던지 올해는 한 몫 하겠다고 기세가 대단하다. 그러나 울타리 밖에서 호시탐탐 집안을 엿보는 사위질방, 환삼덩쿨 등 덩굴식물들이며 황매화와 범의꼬리와 쑥의 기세 역시 위협적이다.


매해 보스코와 내가 낫과 톱, 가위 등 모든 무기로 람보처럼 무장하고서 토벌을 해 왔지만 죽었나 싶다가 해마다 또다시 (자기들이 무슨 수선화라고,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가여운 넋”이라고)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데에는 우리도 못 당한다. 올해도 나는 울타리 안에서, 보스코는 축대에 사다리를 놓고 울타리 밖에서 토벌작전을 폈다. 나는 울타리 안 화단에 자라고 피어난 꽃들이며 잡초 그리고 꽃나무 죽은 가지를 정리하는 세 가지 몫을 하며 보스코와 보조를 맞추느라 죽어라 낫질, 가위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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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박이 보카시 철쭉에 해마다 딱 한 가지 진분홍꽃이 피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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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신에도 진분홍철쭉 가지를 솎다 떨어진 꽃을 버리기가 아까워 우물가 함지박에 물을 가득 받아  가지 째 담갔다. 마침 진이엄마가 보이기에 우리 집엔 식탁마다 엉겅퀴가 꽂혀 있으니 철쭉을 갖다 꽃병에 꽃으라했더니 자기는 싫단다. “저렇게 예쁜데 왜 싫으냐?”니까 꽃을 받을 때는 좋은데 뒷감당이 안 된다.” 라는 의미심장한 대답. 하기야 지난번 내가 미나리냉이와 쥐요줌풀꽃을 꺾어다 성모상 앞에 바칠 때는 엄청 예뻤는데 사흘 뒤 하루아침에 싸락눈 내리듯 꽃송이가 바닥에 하얗게 쏟아져 내렸을 때는 난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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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할 때도 뒷감당이 따른다. 젊은 시절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이 나니도 늙어 꼬부라지니까 자꾸만 뭐라고?” 되묻는 보스코의 귀에 대고 잔소리가 어찌나 많아지는지. 그리고 한때는 나름 멋지던 저 청년도 오늘 아침 머리도 안 빗고 책상머리에서 고개도 안 돌리고 내일 할 강연을 준비하는 뒷모습을 보니, 글이야 석학이라지만 외모는 120% 치매 영감 그대로다아름다운 꽃을 꺾어다 꽂으면 결국 시들어 치워야 하듯 사람의 나이든 인생도 치울 즈음이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는 푸념이 꽃은 아름답지만 뒷감당 못하겠다던 진이엄마의 속말이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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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부터 낮 1시까지 일을 하고 나니 휴천재 울타리가 훤해져 이제 장미가 피어나기만 기다리면 된다. 보스코는 나이에 걸맞게 서재 소파 위로 넉다운 되고 나는 힘이 남아 뒤꼍에서 막 뜯은 참취와 곰취로 맛있는 점심을 준비했다. 사시사철 매 끼니를 입맛 없다느니 않고 주는 대로 맛나게 먹어주는 남편이 고맙고, 그래서 나 같은 시든 여인네도 치워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생존하고 있고 또 생존할 만하다.


내일 서울에 강연하러 간다는 보스코가 봉두난발에 수염도 깎지 않은 채여서 그냥 간다면 큰일이다 싶었다. 젊을 때야 학생들이 내 강의를 듣지 내 넥타이를 보나?” 하는 말도 패기로 봐줄 만했지만 나이 들수록 깔끔을 떨지 않으면(dress-up) 냄새나는 골방 늙은이 취급 받는 건 순식간이다.


레아가 찍어보내준 서울집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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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그를 싣고 읍내에 가서 보스코가 고장낸 컴퓨터(두 아들이 '기계치유'의 은사를 받은 것과 달리 그는 '기계파괴'의 은사를 받았다는 평을 들을만큼 일년에 한두 번 데스크탑을 싣고 나가게 만든다)를 맡기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와 수염을 깎게 하고, 집에 와서는 그가 입고 갈 와이셔츠와 옷을 다리미질하고, 구두까지 닦아 놓았으니 나로서는 준비완료. 서울에서는 큰딸이 그를 마중나가 돌보기로 했다. 초딩 1학년 등교 준비가 따로 없다


오늘 이발소에서 나오는 보스코 얼굴이 밝지 않아 까닭을 물어보니 대통령 취임식이라고 경상도 TV를 어찌나 크게 틀어 놓았던지 무척 속이 상하더란다. '위안부 피해 보상금'을 밀린 화대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작자를 비서관으로 임명한 그자의 취임은 오늘을 국치일(國恥日)로 만들고 남은 셈이어서 앞으로 5년간 토착왜구로 불리기를 꺼려 않는 무리를 어찌 견딜지 마음 단디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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