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24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오후 성삼의 딸들수녀님들이 휴천재 텃밭으로 신선초를 뜯으러 오셨다. 배나무에 준 퇴비를 얼마나 먹었던지 정작 배나무는 해마다 흑성병 적성병으로 몸살을 하는데, 신선초만은 세상 넓은 줄 모르고 한없이 퍼져 나간다. 작년에는 열 사람이 와서 오후 내내 베어 갔는데 올해는 네 사람이 아예 두 번 손질 안 할 심산으로 노랑 콘테이너 박스 네 개에 잎만 뜯어넣겠다는데 저 일이 언제 끝날까?’ 내 걱정이 컸다.


[크기변환]20220422_155647.jpg


요새 드물댁이 날마다 나를 졸랐다. 남호리 우리 밭에 쑥이 너무 좋다며 뜯어다 자기 집 마당의 가마솥에 삶아 빨끈짜 줄 테니까 뜯으러 가자는 얘기다. "교수님이 쑥떡 좋아하시잖아?"가 그 명분이다. 드디어 오늘 오후에 시간을 내기는 냈는데, 땡볕과 깔따구와 한판 전쟁을 치를 생각이 아득했다.


그런데 드물댁은 커다란 푸대와 낫을 들고 나섰다. 낫으로 척척 쑥을 베어 푸대 셋에 가득 채우는데 불과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그러고서는 자기 집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푸대를 비우고 잡초를 가려내기 시작하는데, 그야말로 손이 바람처럼 난다. '이게 일머리라는 게야!'하고 내게 한 수 가르치는 솜씨다.


[크기변환]20220422_145031.jpg


[크기변환]IMG_0220.JPG


[크기변환]20220422_194953.jpg


그제 온 수녀님들도 똑똑한 사람들이라 한 닢 한 닢 낫질하고 있는 일품이 한심하다고 스스로 깨달았는지 전략을 바꾸어 (오늘 드물댁 하듯이) 내가 드린 커다란 푸대와 비닐 자루에 낫으로 쏙둑썩둑 베어 담았다. 열댓 자루는 족히 됐으리라. 이튿날 그 집 수녀님들이 총동원 되어 신선초를 고르고 손질하는 사진을 보내왔는데(신선초 장아찌를 담가 판매한다), 저렇게 해야 하루 세 끼 입에 풀칠하고 단 벌 수도복을 얻어 입는 가난한 삶을 스스로 택한 모습이 참 안쓰럽고도 대견하다.


[크기변환]Resized_20220423_095218(1).jpg


내가 외팔이 신세라 별다른 대접을 못해드렸지만 그래도 집에서 따순 저녁을 대접하니 우리 모두 행복했다. 23일이 내 생일이라는 걸 아는 국수녀님 덕분에 원선오 신부님 작곡에 보스코가 작사한 '엠마오스'도 축하로 불러 주셨다. 은쟁반에 옥구술이 구르는 소리보다 더 아름다웠다. 보스코에게 수녀님들의 합창을 동영상으로 찍어 달리고 내 핸폰을 건넸는데 녹화가 안 되었다. 자기로서는 핸폰으로 동영상을 처음 찍어보는 터라 뭘 눌러야 녹화가 되는 지를 몰랐단다. 수녀님이 아니었으면 내 생일도 모르고 넘어갔을 저 남자를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게 바로 기적이다.


[크기변환]20220423_154148.jpg


[크기변환]20220423_154006.jpg


어제 토요일 점심 후 송전길을 걸었다. 아래층 막딸네 부부가 집을 짓는 중이어서 들여다보았다. 부부는 잘되나 못되나 어쩔 수 없는 '공동운명체.' 남편이 그 집 건축주에 대빵을 하고 아내는 노가다를 뛴다. 생전 처음 하는 건축일이어서 힘도 부치고 기운이 빠져 막딸은 그야마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세 번째 넘어지신 모습 그대로다. 집이 준공되면 저 부부가 부활의 기쁨을 누리리라.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통영서 왔다며 지리산 둘레길4번 구역을 걷는 일행을 만났다. 50대로 보이는 두 쌍 부부는 우리 두 늙은이가 산보하는 모습이 부럽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렇다. 순탄한 결혼생활도 자칫 흔들리기 마련인데 그런 세월을 다 건너뛴 80대 남편과 70대 아내가 봄날의 둘레길을 나란히 걷는 모습이 부러울 수도 있겠다. 저 먼날 조그만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몰래 집을 나와 보스코를 따라 나선 것이 바로 50년 전(1973) 내 생일날이었다!


[크기변환]IMG_0190.JPG


한길에 교통표지판으로 세워진 커다란 볼록 거울에서 우리 둘을 얼굴을 비춰보면서 이슬라 그란트(Isal Grand)의 노래 바로 어제 같은데(Only Yesterday)”를 속으로 읊조리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F1g5SRTBPPI


지난 시간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참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기도 하네요

아이들은 모두 제 갈 길로 갔어요

아이들이 어쩜 그렇게도 빨리 자라 버렸는지

당신을 만났던 바로 그 첫 순간의 감동

당신의 손에서 전해지던 그 따스한 느낌들

진정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들이

바로 어제의 일만 같아요...


[크기변환]20220424_191713.jpg   [크기변환]20220424_194220.jpg


[크기변환]20220424_195700.jpg       [크기변환]20220424_195837.jpg


오늘 일요일 남호리에 나랑 같이 가서 늦은 시간까지 쑥을 뜯어다 손질해서, 자기집 마당에서 삶아서, 씻어 건져서, 빨끈빨끈 짜서, 소쿠리에 열아홉 덩어리로 받쳐 머리에 이고 휴천재로 올라오는 드물댁의 손은 투박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섯 덩이는 내일 방앗간에 쑥절편을 해서 이웃들과 나눠 봄의 기운이 입안에서 쑥향으로 퍼지게 해야지.

 

수녀님들이 신선초를 베어간 뒤라서 어제는 보스코가 맘 놓고 배나무에 소독을 하였다. '경농산업'에서 만든 '충전식 분무기'를 처음 써서 적성병을 예방하는 소독약을 치는데 40Kg 기계를 (둘러메지 않고) 세워 놓고서 50여 미터의 호스를 이용해서 모터로 분무를 뿌리는 작업이라 힘이 덜 들고 골고루 뿌려져서 성능이 아주 좋단다. 검은 머리의 젊은이가 어느덧 백발의 80 노인이 되어 배밭에서 소독하는 보스코를 바라보며 이슬라 그란트의 노랫말이 내 머릿속에서 이어진다.  


[크기변환]20220424_115817.jpg

어제는 배밭에 소독을 하고 오늘은 쌀자루의 쌀을 페트병에 담아 보관하는 우리집 남자

[크기변환]20220423_062616.jpg


당신과 사랑에 빠졌던 일이 

바로 어제 일만 같아요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던 그 말도

바로 어제 일만 같아요

당신과 둘이서 세웠던 젊었을 적의

그 계획들도 바로 어제 일만 같은데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 되어 버렸군요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어제의 일만 같은데


[크기변환]IMG_016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