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2일 화요일. 맑음
토요일 저녁부터 왼쪽 가슴이 찌릿찌릿한데, 어깨와 등도 결리니 코로나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여 진통소염제를 먹었다. 그런데 등과 어깨의 불편함은 사라졌는데 가슴은 송곳으로 찌르듯 더 아파왔다. 보스코에게 월요일엔 진주에 있는 산부인과(함양읍에는 하나도 없다)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겠다니까 그의 '엄살학'이 발동한다.
그는 내 주변에서 가장 증세가 심한 비관주의자다. 결혼 초부터 아내가 머리 아프다면 ‘뇌종양’? 위가 안 좋다면 ‘위궤양“? 이번처럼 가슴이 찌릿찌릿하다면 당장 ’유방암‘? 늘 최악으로 치닫는 그의 상상력은 늘 나를 당혹스럽게 웃긴다.
그의 비관주의는 자기 증상에 관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살로 드러난다. 며칠전 코피 터진 날. 초저녁에 시작한 코피가 새벽녘 다섯 번째로 쏟더니 병원 응급실에 가야 하지 않느냔다. '가게 되면 꼭 앰블란스를 부르라, 수혈을 해야 한다면 자기 피는 B형이다.' 나도 한참 생각했다. "코피 났다고 수혈하나?"
뒤이어 그의 '유언'이 시작됐다. '자기가 저술한 책과 출판대기 중인 책에 대해서는 빵고 신부에게 이미 내용을 보내 놓았고 번역한 내용 파일은 대구 최원오 교수에게도 보내 놓았으니 그가 편집과 교정을 마무리해 줄 꺼다.' 그에게 심각한 뒷일은 아우구스티누스 번역본 출판인가 보다.
소장하고 있는 책들의 뒷처리도 '유언'의 항목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교부학 관련 서적은 최교수에게 증정하고, 일반 신학서적과 사전류(꽤 많다)는 살레시오 관구도서관에 기증하고, 나머지 문학서들과 영적독서들은 수녀님들에게...
그의 '유언'은 다음 항목에서 절정에 이른다. '늙은 나이에 내 장기는 쓸모없을 테니(김원장님의 평가였다) 장기 기증은 못하더라도, 시신 기증은 꼭 하고.....'
보스코의 기우는 새벽 여섯 시에 올라온 아랫집 도메니카의 한 마디, "수십 년 병원생활에서 코피 흘린다고 수혈하는 일은 본 일이 없다."는 한 마디와, 아침 9시 조금 넘어 임실에서까지 달려온 김원장님이 "코피 흘려 죽는 경우는 아주아주 드문 경우니 염려 마시라"는 진단에 겨우 가라앉았다. 코피 사건으로 남원 이비인후과 방문했다 나는 병원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었는데 자기는 멀쩡한 열흘을 지나고서야 보스코는 '약간 겸연적고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결혼 생활 50여년에 겪고 겪은 일화들이지만....
"정신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면(쉬운 말로는 '엄살학' 내지, 임보 시인의 평론서 "엄살의 시학"을 본떠 제목을 붙이자면, '엄살의 미학') 당신은 최적의 연구대상이야."라고 내가 보스코를 놀려주는 건수가 하나 더 늘었다.
이번처럼 가슴이 찌릿찌릿하다면 최악으로 치닫는 그의 상상력은 나를 하도 당황케 하므로 나도 서둘러 그를 안심시켜야 했다. 다행히 진주 사는 친구 헬레나씨가 좋은 산부인과를 소개하고 예약까지 해주어 쉽게 검진을 받았는데 유방과 갑상선 초음파 검사는 '깨끗하다'였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호르몬 불균형이 가져오는 결과라니 견디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 헬레나씨 부부에게 점심 대접을 받고 그 집까지 가서 다과까지 대접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오늘 감자를 심으면서 드물댁이 하는 얘기로는 이장댁도, 면에서 공공근로하는 여자들도 모다 코로나 걸린 후 '가슴이 아프다' 한다니 동병상린의 동질감이 내게도 위로가 된다.
오늘 화요일 아침 먼 산이 투명하고 가깝게 보이니 공기도 좋고, 날씨도 푸근하여 휴천재 텃밭에 감자를 놓기로 했다. 잉구씨가 이미 로타리쳐서 만들어준 이랑에 요 며칠 오려낸 씨감자를 심는 일은 ’누위서 떡먹기‘. 점심을 먹자마자 드물댁이 올라와 빨리 감자 놓자 서두르니 몸이 회복된 다음으로 미루려던 마음을 다잡고 밭고랑에 앉으니 지심이 주는 위로가 아픈 몸을 일으켜 준다.
보스코도 따라 내려와 겨우내 신선한 채소를 제공해준 미니온실을 거두고, 텃밭 창고 ’미루집‘ 안을 정리하고, 밭고랑들 풀을 매주며 우리와 함께 하니 저절로 팀웍이 살아난다. 이렇게 씨 감자 한 상자를 심어 뿌리가 내리면 하지 쯤엔 어머니인 대지가 크고 작은 맛갈진 감자를 열 상자 쯤 선물하리라. 그래서 전라도에선 '하지감자'라 부른다.
간식을 하고서 보스코는 서재로 올라가고 드물댁과 나는 나물을 뜯으러 갔다. 동인씨네 마당에서 머우 애기순을 뜯고, 달래, 씀바귀, 원추리도 뜯었다. 머우꽃은 튀김을 하고, 나머지는 다듬고 데쳐서 물에 담가 놓았으니, 내일 점심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찬을 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맛있는 봄나물 정찬을 해야겠다, 엄살의 달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