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0일 일요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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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우중충해서 하루 종일 책을 들고 앉았다 누웠다 엎어졌다 다시 벌떡 일어나 다리를 세우고 앉는다. 어제 받은 전라도닷컴잡지는 내가 구독하는 잡지 중 제일 좋은 잡지다. 매달 월간 혹은 계간 잡지가 열 개쯤 유료 혹은 무료로 오는데(우리, 시사IN, 공동선, 가톨릭평론, 치빌타 카톨리카), 돈을 냈다고 꼭 읽고, 무료로 보내준다고 덜 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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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라도닷컴을 좋아하는 까닭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묵묵히 살아내는 민초들의 힘이 느껴 지기에 어떤 어려움도 결국은 지나가고 우리는 살아남는다는 신념이 내게도 힘을 보태 주기 때문이다. 전라도 사투리 같은 향토문화를 지키는 저런 토속지는 정말 지켜줘야 할 간행물이다.


아침에 보스코가 들려준 우화. 아랍의 현자 수자가 망아지를 잃어버리고 종일 망아지를 찾아 헤매며 징징거리더란다. 그런데 늦저녁에 만난 그는 환하게 웃으며 알라 신에게 감사를 드러더라나? 까닭을 물으니 내가 당나귀에 타고 있지 않은 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내가 타고 있었더라면 나까지 잃을 뻔했지 않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 본질을 잃지 않는 이들의 소박한 삶은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 많은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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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앓는 동안 우리집 앞을 셀 수 없이 오갔다던 드물댁을 거의 열흘만에 찾아갔다. 맵지 않은 라면과 그미가 즐기는, 데친 오징어를 담아 들고 들어섰더니 내 목소리를 듣고는 죽은 사람이라도 살아온 듯 반색이다. “어째 이제 얼굴을 보여주요? 아무리 올라가 봐도 창문 안으로도 안 보이고... 서울 갔나? 어디 아픈가? 밤이면 불은 써졌는가? 동호땍한테 물어보면 불도 써 있고 차도 있다는데 자기는 못 보겄드만. 보고 자퍼 죽을 뻔했고마. 어째 그라쌌소?” 날 보고 싶어 죽을 뻔했다는, 거의 연애담 같은 반가움과 복사꽃같이 환한 미소가 내 마음을 따습게 달군다. 이렇게 다정한 눈길이 이웃간에는 정으로 흐르고 질긴 인연으로 삶을 엮어 힘든 세월도 그나마 견디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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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 겨울에도 자태를 안 보이던 봄눈이 함박으로 펑펑 내렸다. 나랑 보스코는 생전 처음 눈구경한 하룻강아지처럼 이 방 저 방 돌아다니고 그 방 창밖으로 보이는 눈경치를 카메라에 담으며 탄성을 지른다. 지리산 하봉은 바람결에 잠깐씩 얼굴을 보이다 눈구름 새로 사라지는 변덕으로 속절없이 우리만 애태운다. 앞산도 층층이 하얀 면사포를 썼다 벗었다 돌아서다 고개를 숙이다를 번갈아 하며 온갖 자태로 우리를 자지러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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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게 아직 이리 아름답고 경탄스러우니 아무렴 저승길 떠난다 해도 별반 아쉼 없을 듯하다. 봄나물 소쿠리에 챙겨둔 '세상 소풍' 소감을 말씀드리려면 세 마디 쯤으로 간추려질까? "세상 하나 참 잘 만드셨더라구요." "착한 남자 맺어주시고 좋은 자식들 배급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게 오로지 은총이었더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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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세 시 경 휴천재 앞을 지나던 드물댁이 보스코가 쑥국 좋아한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부엌 창을 두드린다. 칼을 갖고 나오라고, 둘이 뜯으면 금새 뜯는다고 채근한다. 손톱 만큼이나 작은 쑥도 둘이 뜯으니 금방 한 줌이다. 옆에 끼고 손칼만 들면 (강도는 아니어도) 모든 자연을 탐낼 수 있는 게 봄이다. 민들레, 씀바귀, 소리쟁이, 국수나물, 광대나물... 봄에 나온 모든 풀은 다 보약이다. 독이 있어도 물에 두어 시간만 담가두면 독을 다 뱉아내 보약으로 둔갑한다. 내일은 양지 바른 데서 머우싹을 뜯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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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셋째 일요일 저녁 7. 함양본당 신부님이 공소에 미사 오시는 날. 부활절 앞두고 판공성사(고백성사)도 보는 날. 내 속내를 들여다보니 정말 고백할 죄가 많다. 저자들을 죽어라 미워했으니, 날벼락이라도 안 맞나 기다렸으니... 저자들이 마음 돌려 착해지라고 기도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정석이라는 신부님 말씀인데,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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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워낙 창궐해선지 공소 식구 6, 신부님 모시고 온 수녀님과 본당교우 2, 도합 열명의 단촐한 미사였다. 몸이 조금만 불편해도, 자식들이 대처에서 와도 안 나오는 할매들은 코로나 핑계로 공소에 발을 끊은 지 두 해가 넘었고 이러다 공소문도 닫지 않을까 걱정이다


신부님도 힘이 없고 나도 재미가 없고 종교신앙에도 지구적 차원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더라도 인간들이 떵떵거리던 사회가 얼마나 나약한지(How fragile we are!), 인류의 존립 자체가 몇몇 강대국의 핵단추 하나로 끝날 수 있는,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를 새삼 절감하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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