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7일 목요일, 하루 종일 큰비

 

문선생만 혼자 남기고 오색을 떠나는 발걸음이 여간 무겁지 않았다. 비도 비도 그렇게 심하게 쏟아질 줄이야.... 원주까지 국도 44번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빗 속에 달려야 했다. 한계령을 넘어 홍천, 원주, 안동을 거치는 중앙고속도로를 잡았다. 보스코는 비가 덜 올 동해안 도로를 가보자는 말이었지만 내가 배앓이를 하고 있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안동 가까이 오자 하늘이 제법 환해져 생전 처음 하회마을을 들러보고 싶어 고속도로를 나왔다.

빗속에 우산을 들고 골목골목을 도는데 집집이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서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관광객들만 처량해 보였다. 민박집들도 있었다. 이탈리아 남부 알베로벨로에도 그 좁다란 방에서 자보려는 호기심 많은 신혼부부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다만 거기에는 아름다운 가옥들 외에도 갖가지 수공예품, 맛있는 이탈리아 요리가 있었다. 이곳 하회마을 음식점들 메뉴는 어쩌면 그리도 서로 복사판들인지....

 

또 어제밤 오색 민박집의 고생이 떠올라 하룻밤 자고 갈 생각이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별감동 없이 하회마을을 나오자니 좀 미안하기도 했다. 유성룡 선생의 서원이라도 들를까 했으나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가에 안동가톨릭농민회 건물이 있어 반가워 들렀다. 내가 우리밀 공동대표(소비자측 공동대표)였던 시절과 시간간격이 멀어선지 농민회에서 그때 인물들은 다 떠났고 새로운 면면이었다. 보스코는 오원춘사건 때에 서울 평협을 대표해서 안동을 찾은 적 있다고 하였다. 그게 몇 년도인지는 기억도 안 나겠지만 군사독재의 암담한 시절이었다.

 

강성중 총무라는 분이 우리를 맞았다.  다행히 정한길 현사무총장이 우리와 가까운 지인이라서 그의 이름을 대자 이러저러한 말이 이어졌다. 정한길 총장과도 통화했는데 그분이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인 덕이라고 보였다. 부인이 여장부답게 집안과 된장공장일을 온통 맡아서 감당하니까 말이다. 왕년의 기백 좋았던 배용진 회장님도 집에서 병구완중이라고 하여 전화로 인사만 나누었다. 그래도 젊은 세대가 이어받아 안동 가톨릭농민회의 기개를 이어가는 모습이 좋았다. 우리밀 제품을 조금 사서 나오는데 강성중 총무가 사과 한 상자를 선물해 주었다.

 

함양에 다 와서 죽산 휴게소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으로 저녁을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 7시였다. 그러니까 오색에서부터 11시간 걸린 셈이다. 아, 우리집! 지리산이구나! 여기 안식이 있구나! 그 밤새 잠은 어찌 그리 달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