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6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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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없어 혼자서 심심했던지 서울집 쓰지 않던 난방기구가 소리 소문도 없이 잘도 망가진다. 2층 난방용 상향식 보일러에서 물이 떨어져 하루에도 양동이를 두세 번씩 비워야 한다. 나야 주인이니까 그 불편함을 감수해야겠지만 레아에게 내 몫의 일까지 떠넘기는 건 도리가 아니어서 대성셀틱보일러’ A/S를 불렀다. 이상하게도 여름에는 꼭 제일 더울 때 에어컨이 고장 나고, 겨울이면 제일 추울 때 보일러가 고장 난다.


그래도 위대한 대한민국에 산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게 수리공 아저씨가 아침 7시 좀 지난 시간에 부지런히 와 주었다. 2001년에 바꿨으니 11년이 된 보일러! 내년초 LH에서 이 지역 공동개발을 시작하면 다 헐어버릴 집이자만, 보일러는 물론 냉장고도 세탁기도 에어컨에 진공청소기까지 우리 것은 거의 20년을 다 채워가는 노장들이다


계속 살 집이면 고치든 새것을 사겠지만 이제부터는 망가지면 그냥 포기하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버틸 생각이다. 망가져 못쓰게 된 물건을 볼 때, 오랜 시간 함께 했어도 결국은 내 것이 아니었음을, 헤어져야 함을 깨우쳐 준다. 죽을 때 내가 그것들을 떠나야 하니 그것들이 망가져 우리를 떠나도 순서가 좀 바뀌는 것뿐. 지난번 핸폰을 잃어버리고 중고로 산 핸폰도 대리점에 찾아가 A/S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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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에는 이웃 사는 원영씨 부부가 찾아와 동네 재개발 현황을 들려주었다. 빵기 빵고와 이 동네에서 성당을 중심으로 함께 자란 벗들이며 그의 아우도 사제이고 보니 우리와 매우 가까운 사이다. 서울에서 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40년 이상을 함께 사는 것은 여간 보기 드문 일이다. 북한산 도봉산 사이 우이동에서만 가능한 얘기다.


오후에는 이엘리와 한목사가 왔다. 이엘리는 '성체회 제3회' 모임으로 수유리 수녀원에 왔다 들렀고 한 목사는 우리가 여기 올라와 있기에 찾아보러 왔다. 다정한 친구들이란 신앙인의 눈으로 본다면, 영원으로 이어지는 자매들이어서, 쓰다 헤어지는 사물과 달리, 영원한 운명도 함께하기에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잠깐 보고 잠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들이 많으니 마냥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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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요일. 상도동에 있는 함신부님 댁에서 주일 미사를 드리기로 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평일이면 짧은 거리도 한 두 시간이 걸리는데 주5일제를 하면서 주말 근무는 임금이 두 배로 올라가니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가족이 뭉치는 게 제일 싸게 먹힌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부러워했던, 가족 중심의 서구 사회 모습으로 바뀌는 중이다. 우이동에서 상도동까지 강변 도로가 텅 비어 있어 달리기에 좋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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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댁에는 평소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미사를 드렸는데, 구약, 사도행전, 복음서 성서 셋을 참석자들이 다 함께 소리 내어 읽고 그 내용 중 우리 마음에 울림을 주는 말씀에 대한 묵상 나누기를 했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에르네스또 까르데날 지음) 곧 니카라과 솔렌티나메 농어민들의 복음 나누기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1981년에 보스코가 그 책을 번역 출판했었다(분도).


각자의 신앙어린 이야기를 기탄없이 나누는 자리였다. 신부님의 강론 대신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생소하지만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가 복음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게 도움이 된다. 군사독재와 싸우며 여러 차례 투옥된 함신부님의 첫 번 수인번호(囚人番號) 6895가 벽에 걸려 있어 한 사제의 위대한 투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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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일산 사는 보스코의 동창이자 대자인 종수씨네를 방문하여 저녁을 대접받고 가까운 친구들의 근황도 들었다. 보스코는 워낙 아낙군수라 내가 집에서 밀어내지 않으면 의자에 눌어붙는 성격인데 비해 그의 대자인 종수씨는 주변에 모든 사람 특히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을 살피는 특별한 성정을 하느님이 주셨다. 그동안 잊었던 사람들 궁금했던 동창들 이야기를 나누다 배도 부르고 가슴도 따뜻해져 돌아왔다. 지리산에서 보다 서울의 시간은 두 배로 빨리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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