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8일 화요일. 맑음


지리산 하봉에는 눈이 하얗게 내렸는데, 아랫동네에는 자취도 없다. 아침 햇살에 근엄하게 폼을 잡은 천왕봉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야속도 하다. 골짝에도 눈가루 좀 나눠주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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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오를 시간에 맞춰 휴천재 위아래 층 커튼을 다 열어 젖힌다. 겨우 두세 시간 해님을 만나보는 꽃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라고 하는 일이다. 텃밭에 미니온실 덮개는 해를 보게 하는 게 그 속의 푸성귀들이 더 좋아할까, 덮개를 조금이라도 더 덮고 늦잠을 자게 놓아둘까? 다만 식당 채 바깥문을 열어 유리문에 해를 들이면 얇은 문 하나라도 해님의 빛살에 방이 금세 2, 3도 올라가는 것으로 미뤄 햇볕이 생명의 기운이다. 그래서 미니온실 덮개도 해만 나면 거둬준다. 오후 5시경 내려가서 덮개를 덮어주는 일은 보스코의 몫이다.


요즈음 브로콜리마저 얼었다 녹았다 를 반복하더니 검초록의 탐스럽던 꽃이 지쳤는지 허옇게 널브러진다. 서둘러 끊어다 브로콜리 크림 수프라도 만들어야 쟤네들 얼어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나도 걱정이 줄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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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미티 사는 모니카가 알프스 마르몰라다에 올라 스키를 타며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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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텃밭을 보면 장독을 땅에 묻어 배추김치, 동치미, 섞박지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볏집으로 이엉을 고깔처럼 씌운 김치광을 만들고 싶다. 요즘은 시골에서도 누구도 김치광을 안 만들지만 서울 우이동집에서는 축대 밑에 겨우내 해가 안 들어 40여년간 김칫독을 묻어 왔다. 기특하게도 새로 들어온 집사 레아가 독이 묻힌 자리를 발견하고서는 동치미랑 섞박지를 가득 담아 묻었단다. 그 또래의 여인이 옛날의 운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겨울날 엄마가 감자 수제비를 하시면 김치광에 가서 얼음이 서걱거리는 배추김치를 꺼내오는 일은 내 몫이었다. 사골을 푹 고아 기름을 걷어 내고 국물을 부어 맛을 내던 그때의 김치 맛은 지금 와서 내가 흉내도 못 낸다. 오늘 저녁으로 보스코랑 군고구마를 먹으면서 아버지가 한국 파인애플이라 부르시던 동치미며 엄마와 그 손맛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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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날씨가 너무 추워 심장이 안 좋은 사람은 조심하라고들 해서 보스코를 걸리는 산보를 며칠 미뤘다. 오늘은 날씨도 좀 풀리고 바람도 자는 듯해서 송전길을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쳤다. 휴천강은 허기진 사내애들 얼굴에 핀 버짐처럼 군데군데 얼었다 녹았다를 거듭하며 겨울 오후 햇살에 바위를 안고서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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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서 커다란 대밭이 있으면 예전에 몇 집 마을이 있던 흔적이다. 송전길 위로 무성하던 커다란 대나무밭은 포클레인에 사정없이 찢기고 대나무는 베어져 나가면서 먼 옛날 거기에 축대를 쌓고 집을 지어 살던 흔적들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무너진 주춧들이나 부뚜막, 가난한 시절 보리를 문질러야 끼니마다 밥그릇을 채울 수 있었던 확독이라도 보면 나는 숨이 헉하고 막힌다. 그 확독에 문질러진 아낙들의 고달픈 인생이 지금의 내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드물댁이 나랑 휴천재 수돗가에 앉아 푸성귀를 손질하다 보스코가 지나가면 “~~에요오!”라며 은근히 놀린다. 내가 보스코에게 “...하셔요라고 하는 말투가 경상도 아짐 귀에는 퍽 선가 보다. 내 나이 20대의 신혼시절, 광주 농성동 돌고개 밑 농업시험장구내에 살 적에는 남편 출근길에 갓난아기 빵기를 안고 대문 밖에 나와 아빠, 빠이빠이~”인사를 시켰더니만 농장에 일 나온 전라도 아짐들이 내가 지나가면 빠이빠이 온다거나 빠이빠이 간다고 수군대며 놀렸다. 서울로 이사와 우이동에 살 적에도 이웃 골목 아낙들이 여봉~ 여봉~” 콧소리로 나를 놀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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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쥴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는 소문이 도는 윤후보 부인 김건희가 인터뷰를 했고(SNS에 떠도는)조중동의 보도 제목이 자기네 국모에게 올린 글 같아 이 지리산 아낙도 웃다웃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누구는 "쥴리면 어때? 국모를 뽑는 것도 아닌데?"라는 투로 변명해 준 터에 중앙일보는 어엿이 '국모'라는 호칭을 썼다니 내 참... 더구나 그 남편의 부창부수(婦唱夫隨) 회견을 보도하는 논조는 지금 보수언론이 검사 하나에게 목을 매는 희망이 안쓰러울 만큼 절망 섞인 여봉~ 여봉~”처럼 내 귀에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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