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5일 일요일. 맑음


사람들은 온 문을 꼭꼭 닫고 불을 때도 추운데, 텃밭에 푸성귀들은 미니 비닐 온실의 얇은 비닐 한 장이 막아 주는 추위에 견딜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리라. 나마저 그런 생각에 잠을 설치다가 그제 부직포를 사다 온실위를 덮어 주고 나니 안 추운 건 저 식물들일 텐데, 사람 마음도 덩달아 따숩다. 창문 사이를 비집고 쌔앵 달려드는 바람 소리에도 이젠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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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된서리나 강추위가 와도 맘을 놓는 사람들이 있으니 곶감 깎는 이들이다. 날씨가 더워 깎아 매단 감이 늘어지거나 비가 계속 내려 곰팡이라도 생기면 반건시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그해 겨울 농사를 망친다. 요즘은 감을 사다 놓고는 깎을 일손을 못 구해서 감이 홍시가 되면 주인의 마음은 더 붉게 내려앉는다


강건너 운서마을 유선생이 홍시 좀 가져가라는 연락을 했다. 나야 잘 익어 다디단 대봉시를 원 없이 얻어다 먹으니 고마운 일이나 일손이 부족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그 가족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유선생은 문인이어서 귀농한 농사꾼의 사소한 행복들을 엮어서 펴낸 수필집도 한 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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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는 보스코가 휴천재 올라오는 길가 화단을 정리했다. 화단에 자라던 코스모스 대궁이며 호박 넝쿨이며 텃밭에서 서리한 가지대, 고춧대를 걷어서 끌어내다 유영감님네 논에 쌓는다. 매해 초겨울이면 말라 죽은 꽃나무들이며 배나무 가지치기를 한 잔가지들도 그 집 논에 쌓인다. 겨울 바람에 바싹 마르고 나면 날 잡아 바람 자는 해거름에 훨훨 태우는데 그런 불장난도 시골 생활의 한 토막 정취다. 보름달이 훤히 뜨는 밤이면 낭만적인 그림이 그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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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별미 하나가 구운 가래떡. 들기름에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는 일도 시들해진 7, 80 나이 부부에게는 고소한 삶이 된다, 잘 익어 톡 쏘는 동치미를 곁들여. 다만 이가 튼튼해야 한다. 그제 쌀 두어 되를 불려서 마천 방앗간에 가 가래떡으로 뽑아 몇 집에 나누었다. 떡 찾으러 가는 길에 마천 외팔이 짜장면집에서 해물쟁반 간짜장을 시켜 바람처럼 달려와 휴천재 아래 윗집 네 식구가 푸짐하게 별식을 하기도 했다.


어제 오후에는 보스코가 실상사 모임에 다녀왔다. 우리 동네 바로 앞, 휴천재 눈앞에 지리산을 가리고 30미터 높이의 댐을 짓겠다던 국토부를 상대로 지리산 일대의 환경운동가들이 20년간 투쟁하여 2018년 정부로부터 문정댐 백지화선언을 받아낸 역사를 결산하는 자리였다. 둘레길 역시 이 활동가들이 주축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나 지리산에서나 어쩌다 환경지킴이로 엮이며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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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봉 작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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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월 첫 주이자 대림절 둘째 주일. 미루네가 임신부님 오누이를 모시고 문정공소 미사에 오는 날이다. 공소 회장 토마스가 집안 혼사로 출타하여 보스코가 미사 해설을 맡았다


미사 드리러 먼 길 온 신부님 일행을 그냥 보내기 섭섭해 우리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다 보면 좀 분주하다그러나 공소에서 거룩한 성찬이 끝난 뒤 휴천재에서 좋아하는 이들이 나누는 아침 애찬은 삶에 힘을 더해주는 기쁨이 있다. 처음 보고 모르던 사람들도 자주 만나고 함께 먹는 식구가 되면 저절로 가족처럼 되지 않던가? 가족을 아예 식구라고 부르는 우리네 풍습은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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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오후에 거창군청 앞에서 장로가 된 가수 윤형주의 노래를 듣는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가 있다고 해서 거창까지 갔다. 70년대 초 우리 둘이 한참 열애에 빠졌을 때, 트린폴리오의 윤형주가 부르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애절한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곤 했던 낭만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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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에 간 길에 내 한신 후배 표정숙(“한들신문발행인)을 만나 그미의 안내로 거창창포원을 거닐었다. 십삼 만 평 습지에 갖가지 창포가 빛과 색을 잃고 시들어져 있었으나 날이 풀리고 좋은 계절이 오면 다시 오리라는 약속을 나는 안다. 노무현이 좋아 바보주막을 열었던 베로니카와 딸 민기도 만나 그미들이 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밤늦게 지리산으로 돌아오는 길, “웃음 짓는 커다란 두 눈동자 긴 머리에 말 없는 웃음을 띄우더라는 처녀나 그 처녀와 지난 50년간 밤하늘에 별 만큼이나 수많았던 이야기들을 엮으며 백발이 된 보스코! 차갑지만 맑게 개인 휴천재 밤하늘엔 우리의 꿈꾸던 눈들이 올려다보던 그 별들이 여전히 꿈결처럼 반짝이는 시선들을 보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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