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9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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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 10시간 이상 끈기 있게 의자를 덥힌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쓴다는 말이다. 그의 직업이 번역작가이다 보니 번역하는 사람들의 노고도 알고,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충분히 이해를 한다. 그러니 본문에 충실하며 그 내용을 성실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는 요즘도 80 노인이 책상 앞에서 한 줄 라틴어 문장을 놓고 반나절을 푹푹거리며 이곳저곳 책들을 뒤지면서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서 안다.


나도 번역작가의 아내로 그럴 때의 처신도 익혔다곁에 가지 말고 조용히 먼 거리에서 '됐다!'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때까지 그냥 놔둬야 한다. 하루 종일 살림으로 분주하지만 틈나면  그의 가까이서 책을 읽는다. 우리 두 아들도 그런 분위기에서 자랐다. 큰아들과 며느리도 한국에서 사가는 것, 나더러 소포로 부치라는 것은 자기들이 읽을 책, 시아와 시우에게 읽히려는 책들 대부분이다.


빵고 어렸을 적에 아기를 안고 글을 쓰던 보스코(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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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많은 책을 쓰신다고 하시지만 나는 아버지가 쓰신 것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저녁내내 읽어주십니다만 정말 엄마는 아버지가 쓰신 뜻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이따끔 아버지께서 목욕하는 시간에 늦으실 때면 엄마는 백 번이나 가셔서 아버지를 부르셔야 합니다./ 엄마는 기다리시며 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따뜻하게 간직하시지만 아버지는 글을 쓰시느라고 모두 잊고 맙니다. / 아버지는 항상 책 쓰는 장난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어쩌다 아버지 방에 놀러 들어가면 엄마는 와서 나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이 버릇없는 아이야!"  / 내가 조금만 시끄럽게 굴어도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것을 너는 모르느냐?"/ 밤낮 글만 쓰고 또 쓰다니 무엇이 그리 재미있습니까? (타골, “책 쓰는 이초승달)


요즘에 리처드 풀레너건이 쓴 굴드의 물고기 책을 읽고 있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너무 재미있게 읽어 망설이지 않고 책을 샀는데, 역자를 확인하지 않은 게 탈이었다. 우리 말은 우리말인데 이해가 안 된다. 본인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화시켜서 독자가 읽고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하는 게 역자의 막대한 책임이다. 번역이란, 2의 창작이지 제1의 창작이 아니라야 한다. 출판사 '바오로딸'이 40여년간 보스코의 번역본을 선호해서 출판한 까닭이 술술 읽혀서고 내용을 알아들은 번역이어서라고들 했다. 지금 분도출판사가 내는 아우구스티누스 번역본(13책)도 그런지는 궁금하다. 그가 한번 라틴어 원문 번역 주석본을 내면 한 세기 가까이 읽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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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해가 별스럽게 밝았다. 파란 하늘엔 단 한 조각의 구름도 없이 순수파랑 그 자체였다. 침대 시트, 이블 커버, 여름옷, 헝겊가방들... 해가 고맙고 아까워 빨고 또 빨아 세탁기를 4번이나 돌렸다. 오후 햇살은 들꽃에 마술을 걸어 빛나게 만들었다. 송전까지 산보를 했다. 이런 가을 이런 꽃길을 혼자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쑥부쟁이, 꽃등유, 산국, 공작.... 이쪽저쪽에 피어난 꽃 송이들을 쫓느라 눈이 어지럽다. 들꽃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는 길, 너무 행복하다. 방마다 가을을 병에 담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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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우체국에 가서 보스코 암보험(그의 명의로 든 유일무이한 보험)을 해약하고 연장을 포기했다. 20년간 매달 65,000원을 냈는데 안 걸려서 보험금을 못 타더라도 안 걸리고 보험금을 안 타는 편이 더 낫다. 별로 좋은 보험이 아니다. 문정주섐 말로는, 나라에서 다 책임져 주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왜 사적으로 보험을 드는가 나무라던 말에 우리가 승복했다. 첫째 보스코는 암에 안 걸릴 것이며(그는 체온이 높아 밤에도 배를 내놓고 잔다), 둘째 우리가 사는 나라가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태어났음을 상기하고 감사하기로 했다.


우리 부엌에서 일주일이 멀다 하고 쓰던 빵틀이 그것도 두 개 다 눈에 안 띄어 어제 새벽부터 이틀내내 찾았다. 내 두 눈 만으로는 안될 것 같아 보스코에게도 도움을 청했는데 1+1=1이 못돼고, 이번엔 1+1=0. 바늘도 아니고 실뭉치도 아니고 지름 26cm나 되는 팬을 찾으라 팬값의 열 배의 시간을 허비한 후에 새로 구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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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부엌 찬장과 창고를 모조리 뒤져 버릴 것을 찾아 문밖에 내놓고, 냄비들이 더러워 보여 큰솥에 삶아 벅벅 씻었다. 나이 들수록 우리집 그릇이 고양이 밥그릇 같이 더럽다는 흉을 젊은이들에게 안 잡히려는 자존심은 아직도 남아 있다. 보스코는 깨끗한 그릇인데 왜 난리냐?’하는 것으로 보아 나보다는 좀 더 많이 내려놓은 듯하다


냄비와 뚜껑이 온통 부엌 바닥에 나와 뒹구는 모습을 보니 빵고가 생각난다. 걔는 어려서 유난히 냄비와 뚜껑을 좋아하여 부엌의 냄비들을 모조리 꺼내놓고 뚜껑과 본체의 짝을 맞추며 하루 종일 혼자 놀았다.


조하성봉 작가의 어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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