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3일 목요일. 맑음


올해는 대추가 빨리 익어 마구 떨어져 뒷뜰 하수구 앞에 수북이 쌓여 있다. 아까워서 빨리 대추를 따야 할 텐데 하면서도 딴 일로 바쁘다 보니 자꾸 미루어 왔다. 워낙 많이 열려 남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다며 꾀를 부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성나중씨가 어제 오후 식당채 앞뒤로 오가며 대추나무 밑에 텐트 천을 깔고 있었다. 나는 추석 모임 뒷정리를 하느라 몸이 천근인데... 대추를 털더라도 대추 줍는 것은 내 몫이어서 그 일도 보통이 아닌데... 아마 아들과 함께 대추를 따고 싶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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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빵고신부가 2층 식당채 지붕 위에 올라가 털고 보스코는 윗길에서 대나무로 털었다. 나는 오리궁둥이를 하고 퍼져 앉아 줍다 보니 잘 익은 대추들이 방석 밑에서 그대로 으깨진다. 커다란 소쿠리로 두 소쿠리를 땄는데 깨끗이 물로 씻어 집안에 들여놓았더니 농익은 대추향이 집안에 가득하다.


대추를 따고 씻는 일은 할 만한데, 말리는 일이 큰일이라 어젯밤에 윗말 인규씨에게 전화해서 그집 건조기에 넣어 좀 말려 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아침 일찍 친절한 잉구씨가 대추를 가지러 내려온다고 전화를 했다. “미안코로!” 하는 내 치하에 언니야 차는 째깐하잖아? 우리 트럭으로 후딱 갖고 올꺼고마. 됐다!”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물게 인간미가 넘치고 피가 통하는 아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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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에는 동의보감촌에 가서 귀요미 미루네와 추석맞이 저녁을 같이 먹었다. 늘 먹던 육회비빔밥을 찾는데, ‘재료가 다 떨어져일찍 식당문을 닫았고 근처의 다른 매장도 식재료가 다 떨어져 문 닫은 집이 많았다. 그동안 코로나로 눌려 있던 사람들의 욕구가 폭발한 듯하다. 그 동네에 아직 문을 연 식당에 들어가 세상에서 제일 맛이 없을 듯한 버섯전골을 먹고서 그대신 동의보감촌 남쪽 전망대를 차지하고서 우리 다섯이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목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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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빵고 신부는 45일의 명절 '본가방문'을 끝내고 대구로 떠났다(주교회의 교리교육위원회 회의 참석차). 어제 오늘까지 닷새 동안 아침마다 아들이 집전하는 미사와 영성체는 참 좋았다. 성무일도도 함께 바치고. 빵고는 엄마 집을 떠나면서도 침실정리, 빨래, 청소까지 말끔히 해놓고서 간다. 엄마의 아픈 손가락에 대한 애도와 잔소리도 잔뜩 남기고서. 나는 하루에 (보스코 본인의 말대로는) 백 마디쯤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는데, 주변에서 나에게 잔소리하는 유일한 사람이 빵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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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뭐라 잔소리해도 안 보면 그만이니까, 오늘 하루 안에 한가위 뒷정리로 청소, 빨래, 정리정돈에 다리미질까지 다 마쳤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마쳐야 하는 이유는,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눈뜨기 전에 날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스코도 손님방들 이부자리를 모조리 걷어다 테라스에서 일광욕을 시켜서 이불장에 정리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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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가 코로나 백신을 맞는 사진을 보내왔다. 스위스에서는 15세부터 백신을 맞나 보다. 사진에서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인데, 본인은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사춘기에 걸친 세대로서의 미숙함이 귀여워 보고 또 본다.


요즘 저녁 산보는 여섯시가 좀 넘어서 나가도 금방 어두워진다. 돌아오는 길이 어두워도 좋은 점은 밤 하늘에 별이 더 선명하고 반딧불이가 사방에서 형광색 불꽃놀이로 우리를 맞아주기 때문이다. 오늘은 반딧불이 한 마리를 생포해서 송문교 가까이에 있는 가로등 불에 비춰보려 했는데 손바닥을 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축하해! 반딧불이의 탈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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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이면 송전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군내버스 막차가 날마다 우리 두 노부부의 밤중 데이트가 눈에 익어선지 기사님이 깜박이를 켜며 반갑다는 안부를 전하며 지나간다. 단 한 명 승객도 없이 들어왔다 단 한 명도 없이 나가는 유령버스여서 기사님도 심심할 게다


여름 밤 남쪽 하늘에 기세 좋게 꼬리를 치올리던 전갈좌가 지리산 너머로 기울고 목성과 토성이 '여름 밤 대삼각형'(거문고좌, 백조좌, 독수리좌)을 가로질러 지나가면서 궁수자리로 빠지는 하늘에 가을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은하수를 따라 흐른다. 날이 많이 차졌다. 한더위도 갔고 한가위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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