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9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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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집이라고 이 추석에도 시동생들과 동서 둘이 광주에서, 송탄에서 휴천재로 온다. 코로나 전만 해도 조카와 조카 며느리들과 손주들이 오면 스무 명이 훌쩍 넘었는데 어른들만 여섯, (그리고 기회 있을 적마다 두 아들을 대표하여 부모를 찾아와 효도하는) 빵고 신부만 모이니 올해 추석은 참 단촐하겠다. 아랫집에는 어제 진이와 신랑 그리고 손주 한빈이가 오자 갑자기 시끌벅적 집 전체에 생기가 팍팍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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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빈이는 우리 식당채에도 일 없이 들락거리며 올 때마다 과자 한 개를 내 손에 내밀고 씨익 미소를 고명으로 올려주고 돌아간다. 태어나 돐잔치 때에 처음 보았던 여아가 애엄마가 되고,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에 없던 생명이 태어나 종종종종 뛰어다니며 이 늙은 나무 그루터기 같은 홰틀 사이에 꽃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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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쯤이면 독일가문비 꼭대기를 점령한 능소화가 마지막으로 개화할 무렵인데, 초여름에 찾아온 선녀나방에 꽃은 모두 망가져 버리고 명 긴 한 두 송이가 자기가 무슨 꽃나무인지 '존재론적 증명'만 해 보이고 있다. 외래종은 나쁘다, 그런데 벌레들은 더더욱 나쁘다. 식물들이 방어 기제를 만들기도 전에 점령해서 철저히 망가뜨리니 손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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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녁 산보길은 너무 서늘해서 겉옷을 걸쳐야 한다. 지리산 자락 와불산 위로 덩그러니 걸려 있는 달은 8월 대보름을 향해 마지막 몸을 가다듬고, 달이 실루엣으로 걸치고 나은 구름너울이 하늘하늘 춤을 춘다. 모든 게 여물어가는 계절, 문정식당 아줌마가 하루 종일 산비탈을 다람쥐처럼 누비면서 허리가 휘게 주워다 모은 알밤이 그집 마루에 산을 이루고 있다. 산다람쥐가 겨울 날 밤이라도 좀 남겨두기는 하셨는지


추석 잔치 다시 내리는데 쓸 멸치똥을 바르는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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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줌마네 개(얼룩덜룩 못 생겨서 사람들이 일본개라고들 한다)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개가 흰둥이 한 마리를 대동하고 동네에 떠도는데 오늘은 우리 채마밭을 휘젓고 다니다 내 고함에 달아났다. 그 못생긴 얼룩 무늬 주인이냐고 문정식당 안주인에게 물으니 "우리 개는 개 줄에 꽁꽁 묶여 있어. 두부공장집 암캐 냄새에 멀리서 원정 온 사윗감이여. 미워라 말고 그집 암캐 새끼 가지면 오라 불러도 안 올 테니까 조금만 참으셔." 라는 유머러스한 자초지종을 들려준다. 아무래도 내가 개를 쫓아가 붙잡을 만큼 날래진 못하니 참을 수 밖에.


빵고 신부가 추석휴가차 2시에 도착한다 해서 늦은 아침을 먹고 읍으로 나갔다. 조금 일찍 나가 보스코의 추석 이발을 시키고서 버스로 내려오는 아들을 맞아 읍내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휴천재로 들어왔다.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얻어오는 기분이다. 대처에서 자식 내려오는 이곳 아짐들의 반가움을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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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후 5시쯤에 커다란 선물 보따리가 또 휴천재에 도착했다. 둘째서방님(성찬성)과 동서가 늦었어요, 형님, 미안해요!” 인사와 함께! 서방님네가 늦은 게 아니고 하루 일찍 온 길이었다! 도정 이기자 말마따나 귀촌생활은 매일이 휴일이니까(every day holiday) 오늘이 무슨 날 무슨 요일인지 알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나야 이삼일 걸러 일기를 쓰느라 날짜 가는 걸 뚜렷이 알지만 시골 할매들에게 요일, 공일, 반공일은 의미가 없다


동서 말로는, 며칠 전 서방님이 말벌 두 마리에 정수리를 쏘이고 나서는 일시에 치매가 왔고, 자기는 귀가 반쯤 먹어서 세상 돌아가는 줄도 모른단다. 우리 넷은 오랜만에 하루를 더 같이 지내게 되었다며 신나게 웃었다, '까치설날'이 있다면 '까치추석'도 있을 법하다며. 서방님이 함평 농장에서 키우던 오골계 여섯 마리를 생포해 푸대에 담아 왔다. 우선 서방님이 몸체를 붙잡고 보스코가 한 다리에 끈을 묶어 감동 옆에 붙잡아 맸다. 내일부터 잡아먹기로 했으니 내가 팔걷고 나서야 한다. 


40여 년 전 저 고난의 70년대에 우린 서울 쌍문동 덕성여대 뒤(지금도), 서방님네는 뒷산넘어 꽃동네에 살면서 무척이나 가난하지만 무척이나 자주 오가던 때도 있었다, 우리도 애들도(빵기와 빵고, 꼬끼와 쫍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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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매달 셋째 주일. 저녁 7시 공소미사가 있어 본당신부님이 오셨다. 빵고신부도 함께 미사를 집전했다. 오늘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어서 이 어둔 밤에 공소를 찾아오며 본당신부님은 많은 생각을 하셨나 보다


그 어둡고 캄캄한 박해시절 깊은 산속으로 도망가고 바닷가로 도망가서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에게는 공소가 신앙생활 전부였단다. 첫 입교자 이승훈 이후로도 사제 하나 없이 신자끼리 보낸 세월이 40여년이었으니까 한국천주교는 공소로 시작하고 공소로 다져진 교회란다. 주님께 받은 소명 하나로 조국 프랑스를 떠나 조선 땅에 들어와 목숨을 걸고 전교하다 순교한 선교사들에게 우러나는 감사가 저절로 기도가 되는 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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