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4일 화요일. 잔뜩 흐리고 가랑비


보스코를 걸리는 저녁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은 늘 드물댁 집앞을 지난다. 그 시각쯤이면  드물댁은 불을 환히 쓰고’ 날 기다린다. “아줌마 뭐해요?” 소리에 반갑게 일어나 문을 열어주면 (보스코를 먼저 올려보내고) 한 10분 아줌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나는 갈라요.” 일어서면 그미는 나는 잘라요.” 환한 미소로 밤인사를 나눈다.


한 일주일 전부터 드물댁이 화면이 나가버린 TV 앞에서 소리만 듣고 있다. “왜 안 켜고 그렇게 앉아있어요?.” “테레비-라디온기라. 30년 썼더니 탁 나가뿌리고 기술자가 와도 몬 고치드만. 지 명이 다 되서 죽어삐린기라.” 


할매들에게 테레비는 친구고, ‘맨날 밥이나 달라는 영감보다훨씬 나은 존재다(그런 영감이라도 살아 있는 집은 몇 집 안 되지만). 아침에 눈뜨면 켜고, 나갈 때 끄고,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테레비 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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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막내)이 사가꼬와 실치해 준다꼬' 해서 기다리는데, 그날이 쉽게 오지 않나보다 했더니 그래도 엽렵하게 엄마 생각을 더 하는 딸들이 56인치짜리 커다란 TV를 사서 이미 보냈단다. 추석 전이라 배달이 늦는다 해서 맨날 그리운님기다리듯 TV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딸들과 언쟁이 있었나 보다. 내일 아침에 TV 탁자 택배가 배달 온다는데, 아줌마는 공공근로를 간다 하고 딸들은 하루 빠지라 하고... '면에서 시키는 일 하루라도 마음대로 빠지면 다음에 일을 안 준다'며 울상인 아줌마. 공공근로 그 돈으로 생활을 하는 할매들에게는 그야말로 밥줄이다. (물론 노인연금, 복지수당, 공공근로로 받는 돈은 아끼고 아껴 알토란처럼 모아져 거의 도회지 사는 아들네한테로들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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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내일 집에 없으면 택배 배달을 추석 이후로 미룬다!'는 택배회사의 위협적인 연락이 있었다기에 '내가 받아 줄 테니 아줌마는 일 가라.' 하고서 택배회사더러 '그냥 예정대로 가져오시라'고 전화해 주었다. 딸들한테도 전화를 해서 가구(TV 받침대)를 받은 다음에 TV가 오면 설치하도록 내가 수령하고 감독할 테니 안심하라고도 일러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구나 부산에서 딸 하나가 달려와야 한다).


오늘 아침 때마침 태풍 온다는 핑계로 공공근로가 취소되어 집에 있던 드물댁이 '사람들이 뭔가 갖고 왔는데 받침대가 아니고 테레비가 왔다'고 헐레벌떡 올라왔다. 보스코에게 서둘러 아침을 챙겨주고 내 아침은 싸 들고서 그 집으로 내려갔다. TV 올려놓을 받침대가 먼저 온 후에 TV가 왔어야 하는데 순서가 바뀌어 아줌마의 한숨에 땅이 꺼진다전화받던 목소리로는 성미가 좀 고약할 것 같은 배달 아저씨가 무서웠나 보다. 드물댁은 평생 그랬는지 남자의 윽박지르는 소리면 주눅이 들어 아예 입도 

뻥끗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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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가 넘어 받침대 배달 차량도 오고 '갓 출소한 듯한 얼굴을 한' 사내가 인상을 팍팍 쓰며 가구를 내려놓고는 그냥 가려 한다. "아저씨, 노친네가 무거워 다룰 수 없으니, 저 TV 좀 올려 주실래요?" 했더니만 "그걸 잘못 만졌다 사고 나면 내가 다 물어야 한다구요. 그래 지난번에는 800만원이나 물어 줬다구요." 물론 뻥이다. 내가 한참 목소릴 누르고서 "아저씨, 착한 일을 하면 내 맘이 더 편해요. 싫으면 그냥 가셔요. 안녕히 가셔요." 


드물댁과 나 둘이서 끙끙 TV를 올리려 애쓰는데, 그 기사가 다시 왔다. "저리들 비켜욧." 하며 그 남정네는 가구를 상자에서 꺼내 설치하고 그 위에 TV를 가뿐하게 올려서 설치했다. 고생했다며 커피 값 팁을 주려니까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시원한 물이나 좀 주쇼." 한다. 험한 얼굴에 그래도 자존심을 살리는 남정의 얼굴이 귀여워 보인. "그런데, 왜 돌아왔다요?" 물으니 "저 노친네 때문."이란다. 얼굴은 고약해도 추석 지나서까지 TV없이 혼자 지낼 할매의 사정을 생각해준 그 사내의 너그러움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


가구가 오는지, TV가 오는지 전혀 모르는 엄마를 멀리서 바라보는 딸들은 자기네 직장(마트 카운터)에서 추석 대목으로 바빠 애가 타고, 그저 '이층아줌마' 내게 의지하는 마음이나, 새로온 커다란 화면을 켜고서 흐뭇한 얼굴로 '조상님 산소에서 주워온' 삶은 밤을 투박한 손으로 까서 내 입에 넣어주는 드물댁을 보는 내 마음도 환한 웃음이 한 입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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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이는 '문상안길'은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하는 인생길이다. 어제는 크리스타나라는, 로마 살레시안 대학교 라틴어문학부에 다니는 처녀가 부산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함양에 와서 군내버스로 문정리까지 와서 보스코에게 인사차 다녀갔다. 그미가 성공리에 학위를 한다면 보스코의 40년 후배가 될 게다. 


그리고 오늘은 인천에서 가정식(엄마손) 이탈리아 식당 '디모니카'의 고모니카씨가 꽃처럼 예쁜 손녀 서린이를 데리고 휴천재를 방문하였다. 모니카씨는 워낙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어서  마리아라는 처녀와 그 엄마를 대동하고 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영국에서 공부하며 라틴어를 배웠고 런던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 10월부터 로마 안젤리쿰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는 처녀였다. 한국인으로는 라틴어문학 학위를 최초로 받은 보스코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라도 라틴어문학을 공부하는 후학들이 등장하는 일을 여간 반기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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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역시 여자가 빛내는 나라다. 지리산 자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붙잡고 지금도 씨름하는 흰머리의 저 팔순 남자를 보러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연달아 출몰하는데 왜 나는 위기 의식을 하나도 안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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