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7일 화요일. 흐림
월요일 아침 9시 버스로 보스코가 임플란트를 하러 서울엘 가는데, 혼자 보내려니 막내 학교 보내는 첫날 기분. 내가 하루에 왕복 800Km 오가며 8시간을 운전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한 그가 '나도 혼자 할 수 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홀로 서기를 선언한 것이다.
나는 간식을 챙겨주고, 지갑을 주머니에 넣는 그에게 돈이 얼마나 있나 물었다. 충분하단다. ‘내놔 봐요.’해서 건네받은 지갑엔 달랑 3000원이 전부. 언제나 돈을 챙겨 넣어주었던 게 내 실수. 돈을 넣어 건너 받은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의 표정이 묘하다. '엄마가 다 해준다'는 메시지 같은데 그의 신뢰인지 내 오지랖인지 잘 모르겠다.
그의 컴퓨터가방에 노트북과 간식, 물, 커피 우유를 넣어주며 ‘이건 간식이니 점심은 꼭 챙겨서 사 먹으라’고 일렀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나선 길이니 해방감도 있으련만, 돌아와서 밤에 물으니 그가 해방감에 한 일이라고는 새우버거 한 개 사먹은 게 전부! 수년 전 킹크랩 먹고서 알레르기가 발생해서 그간 고생하고 된장국에 넣은 새우도 못 먹었는데, ‘과연 두드러기 나나?’ 알아보려고 좋아하던 새우버거를 사서 반은 점심으로 반은 돌아오는 차 타기 전 저녁으로 먹었단다.
건설적으로 한 일이라곤 버스 속에서도 기다릴 적에도 짬 나는 시간마다 노트북을 켜고서 번역해온 글을 윤문했다니 집에서나 나가서나 변함없는 일꾼이다. 치과 시술이 끝나자마자 5시 30분 버스로 돌아오는 그를 함양 차부로 마중나가 집에 들어오니 밤 10시.
그가 서울 가고 없는 시간에 나는 빗속에 상림 숲을 걸었다. 꽃무릇이 막 꽃송이를 올리고 성질이 급한 순서대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음 주에는 만발하겠는데, 9월10일부터 ‘함양 산삼축제’가 시작하니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고 싶은 요즘이라 올 꽃무릇 구경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예전에 상림 옆으로 끝없이 펼쳐지던 연지(蓮池)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름도 생소한 '버들마편초'라는 보라색 꽃이 초가을 가랑비에 떨고 있다. 족두리꽃, 노랑코스모스, 백일홍, 키작은 해바라기, 라벤다, 팬지, 금송아 등이 마치 긴 가을 장마에 새벽시장에 팔다 버려진 시든 꽃처럼 추레하다. 이렇게 비가 올 때는 싱싱하고 건강한 연잎에 또르르 구르는 물방울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걸 왜 그들은 모를까! 왜 그 연꽃을 사그리 뽑아 버렸을까?
상림숲 주변 전부를 ‘급조 화원’으로 치장을 했는데 돈이야 중앙정부에서 나왔으니 어떻게든 써야 하는 게 공무원들의 사고방식인가 보다. 그 멋진 상림 연지를 망치고 이상한 건물로 주변환경까지 엉망으로 만들고도 자기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나 보다. 인간의 손을 덜 탈수록,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일 때, 곧 ‘자연스러울 때’ 가장 아름답다.
가을장마가 오래가면서도 비가 오는지 마는지 매일 그 모양인데, 비 온다고 일 안 하면 일할 날이 없다. 세 번째로 다 따먹은 옥수숫대가 배나무밭 옆에 버티고 있으니 보기에 영 불편하다. 오늘 아침을 먹고 나서 옥수수 대궁을 낫으로 베내고 뿌리를 괭이로 뽑아 자두나무 밑에 쌓아두었노라면서 비 뿌리는데 자기 일 시켰다고 ‘성나중씨’가 은근히 나를 성토한다.
나도 우산 대신 밀짚모자를 쓰고 내려가 배추 밭 빈 틈에 어제 사온 브로콜리를 심었다. 모종 20여개는 심었으니 누군가 먹겠지. 흙에다 묻어만 주면 부쩍부쩍 커가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이곳에서 제일 큰 재미다. 배추잎이 자라 오르면서도 결코 아랫잎과 겹치는 일 없이 번갈아 돋아난다. 오묘한 이치다.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도 다른 풀도 새로 돋는 가지나 잎이 아래 가지나 이파리를 덮지 않게 배려하는 모습에서 창조주의 섬세하신 섭리가 보인다.
‘잉구씨’가 빗속에 고추가루를 100근 가까이 되게 가져왔다. 친구들 부탁으로 주문한 터라 내가 상자를 만들고 근수 대로 챙겨넣고 테이프로 붙여 농협에 싣고 나가 택배로 부쳐주었다. 착하디 착한 잉구씨 엄마의 고추농사를 돕는 일이기도 하고, 지인들이 ‘착한 고춧가루’를 먹게 돕는 일이어서 참 좋다.
오후에는 드물댁이 올라와서 정자에서 나랑 멸치를 다듬었다. ‘비 와서 토방 마루에서 멍 때리고 있었는데 나랑 말동무도 하고 맛난것도 주니 조오타’는 소감. 니약니약 빗속에 그미의 고생스러웠던 라이프 스토리가 펼쳐진다. 가난을 안고 태어나고 가난을 이고 살고 가난을 깔고 눕던 시골 아낙의 삶이다.
개가 풀려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일을 좀처럼 보기 어려운 터에 하얀 강아지 둘이서 나란히 마을을 쏘다닌다. 우리 저녁 산봇길 또랑을 보니 아까 본 강아지 한 마리가 빠져 있고 다른 한 놈은 의리 없이 사라지고 안 보였다. 축대가 깊은 또랑이라 혼자서는 올라오지 못해 가련한 처지인데 한 놈은 어디로 갔을까? 새끼줄 가지러? 주인 부르러? 잠시 후 돌아가서 보니 물에 빠진 개도 안 보인다. 짝꿍의 배신에 열 받아 혼자서 또랑을 탈출했나? 흐흠, 아니면 동무한테(아니면 수컷에게) 자력갱생을 가르친 그것도 암컷의 묘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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