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일 목요일, 흐리다 또 비


대나무 장대로 논두럭을 툭툭 치며 나락과 얘기를 나누던 구장이 사람도 없는데 혼자 중얼대던 모습을 나한테 들켜 몹시 쑥스러웠나 보다. "암데도 쓰잘데기 없는 가을장마가 왜 이리도 긴지 모르겠서라."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면 배추도 무도 다 녹아버리겠어요. 날씨가 뜨거워야 하는데.... '한 마지기 논에 하루 쏟아지는 햇볕에 쌀이 한 말씩'이라잖아요?" "맞고마, 해가 안 나면 잡풀이 기승을 부리고, 쌀엔 쭉정이가 많아 싸레기가 돼버린다 말요." 늦장마가 오래가면 농부들 시름이 짙어진다니 하늘 농부님이 가을비 거둬가실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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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엊그제 씨앗이나 모종을 심은 텃밭을 들러보며 이랑이랑에 말을 걸어 안부를 묻는다. 텃밭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여자를 보면 대개 또라이라 하겠고 누구는 '아하, 식물과도 교감하는구나.' 하겠지만 오래 키우고 자꾸 바라다 보면 저 푸성귀들도 너무 예쁘고 너무 사랑스러워 절로 말을 걸게 된다.


지난번 심은 상추는 잎을 따먹는 중인데 앞으로 열흘은 더 먹겠고, 그 뒤로는 열흘 전에 심은 상추 모종이 밥상엘 오를 테고, 겨우 두 잎 내민 어린 상추는 한 달 후를 기약한다. 옥수수도 4월부터 한 달 간격으로 몇 알 씩 땅에 박아 주었더니, 용케도 제때를 알고 익어 밥상에 오른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에 나가 한 소쿠리 따다가 쪄서 아침으로 먹었다.


요즘은 배나무 옆에 바싹 심었던 옥수수를 따 먹는데, 그새 마늘밭 옥수수가 꽃을 피우고 아가 머리털 같은 수염을 내밀었으니 9월 말에나 먹게 될 게다. 이렇게 해서 옥수수의 계절 이 끝나면서 가을걷이가 시작된다. 하지만 모기가 물고 몸이 고달파도 나는 여름이 좋다. 산들바람이 불고 가을이 온다고 좋아들 하는데 나는 가는 세월이 아쉽다.


배추와 무는 이미 심었으니 김장 준비는 됐고, 봄여름 채소가 사라진 자리에는 양파와 마늘을 심을 게다. 따로 먹기로 남겨둔 쪽파도 마저 심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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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무와 배추를 뽑아 김장이 끝나면 밭에 볼록한 무 구덩이 볏짚을 들추고 무를 서너 개 꺼내 긴긴 겨울 밤 서걱서걱 날무를 씹으며 삭풍의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겠지. 기나긴 겨울밤 책 읽기 역시 내가 좋아하는 오락. 휴천강에 산보 나가 쨍하고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들을 일도 나쁘지 않다. 얼음 밑으로 반은 얼고 반은 조는 피라미들을 들여다보는 일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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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농사를 끝마친 터라 물까치떼를 쫓아보내라고 배밭에 허수어매로 걸어 놓았던 빨간 원피스를 걷고 모자도 벗기고 목욕탕 대신 세탁기에서 말끔하게 목욕을 시켰다. 내년 늦여름에 다시 배밭에 근무시킬 예정이다. ‘허수매도 걷어다 창고에 잘 모셔두었다. 새를 쫓겠다고 두드리던 싱잉볼(네팔에서 사온)은 요가 매트 곁으로 돌아왔고, 수돗가 양동이는 새 쫓느라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졌다.


어제 드물댁이 풋고추를 한 주먹 주기에 갈치 밑에 깔아 맛나게 졸여 그미에게도 한 접시 갖다 주러 갔다. 공소할매네 집에 있다기에 그리고 갔더니 공소할매가 '사람 고프던' 차에 잘 왔다는 듯이 포도랑 음료수랑 끝도 없이 뭔가를 내어 놓으신다


방이 여섯이나 되는 커다란 저택에 큰아들과 며느리, 손주 다섯 다들 떠나고 텅 빈 방마다 거미와 적막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짜고 있다. 걸음 떼기마저 힘든 저 할매마저 떠나면 이 집은 누가 들어 살까? 벌어진 문틈들 사이로 벌레와 삭풍만 드나들겠지. 세찬 돌풍이 감나무 가지를 뚝 부러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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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마지막 남은 작년 고구마를 전기냄비에 구웠다. 우유랑 저녁으로 먹어야겠다.작년 고구마가 사라진 자리엔 햇고구마가 또 자리를 찾아오겠지.


보스코는 어젯밤 또다시 틀니(임플란트 준비용)를 잃어 먹었다. 어제 송문교 로사리오 산봇길에 떨어뜨린 것 같다는데 오늘 그 길을 되짚어 다녀왔지만 못 찾았단다. 팔자가 기구한 그 틀니가 어디서 헤매는지, 어느 주머니에 아직 들어 있는지, 길가에 떨어져 자동차 바퀴에 박살이 났는지 알 길이 없다. 서울 가서 임플란트를 매듭지어야 나도 속이 편하겠다. 정작 본인은 틀니가 있든 없든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니 일심동체의 반쪽인 내가 더 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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