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15일 일요일. 맑음


목요일 저녁산책에서 돌아오던 나를 기다렸는지 자기 집 토방 디딤돌에 앉아있던 드물댁이 벌떡 일어나더니 아침에 따놓은 거라며 호박을 내어준다. 우리야말로 하루에 점심 한 끼만 한식을 먹으니 도통 무슨 반찬을 해도 굴지를 않는다. 오드리 얘기로는, 요즘 새로 짓는 아파트촌은 지하에 공동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밥집)을 만들어 집에서 밥하기 싫거나 단독으로 사는 사람들 식사를 해결한단다. 식사 문화가 달라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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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만 해도 농한기에는 마을회관에서 동네 할매들이 모두 모여 돌아가며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를 하니 때를 거르지 않아 겨울이 지나면 할매들 얼굴이 뽀얗게 아기 볼처럼 통통해진다. 나 역시 늘 반찬을 넉넉히 해서 이웃들과 나누는데도 나이 들어 입도 짧아지고 적게 먹으니 호박 한 개로 반찬을 해도 여러 날 간다.


드물댁에게 "잉구가 갈아준 밭에 내일 새벽 고랑을 치고 무배추 심을 준비를 할 터이니 아줌마도 아침에 일찌감치 와서 아줌마 텃밭도 장만하시라" 했다. 금요일 새벽, 보스코가 모처럼 먼저 일어나 일복을 챙겨 입고 나선다. 텃밭에 내려가 보니 '핸폰 아줌마'가 드물댁한테 '다섯씨!'라고 깨워줬는지 우리 텃밭에 올라와 아줌마 몫으로 떼어준 땅을 벌써 다독여 고랑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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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보스코가 밭고랑을 내겠다며 괭이질을 하는데 얼마나 삐뚤빼뚤 파가는지 "여보, 하느님은 굽은 펜으로도 직선을 그리신다는데 당신은 직선의 괭이로도 곡선을 그리는 재주가 있네요."라고 놀려주었다. 보스코는 특단의 조처로 기다란 쇠파이프로 늘어놓고 그 선을 따라 고랑을 파갔다


아랫집 도메니카 말마따나 전순란은 밭일마저 강박적으로 정형화한다고 지적한 적 있는데 밭고랑도 삐뚫어지거나 길이가 안 맞으면 못 견디고 기어이 손질해서 고치고야 만다. 내가 하는 꼴을 보고는 드물댁도 따라 다시 이랑의 크기를 맞춘다. 산비탈 논밭에선 흙이 참으로 귀하다. 무슨 소용으로든 남의 밭에서 흙을 퍼갔다간 당장 시비가 붙는다. 우리 텃밭에서도 이랑을 만들며 부족한 흙은 밭구석에서 일일이 퍼날라 덮어야 한다. 


수십 수백년 논으로 쓰던 땅이지만 은근히 자갈이 많아 골라내고 있으려니 드물댁도 자갈을 골라내며 나도 감자 좀 캐야겠다.”란다. 열 시가 다 되어 그만하고 집에 가서 아침 좀 먹읍시다” 라며 자갈이 오줌을 싸야 밭농사가 잘 된다고 어른들이 얘기해 왔다고, 밭에는 으레 돌이 같이 섞여 있는 법이라고, 너무 완벽하게 하려다 일을 그르친다는 이치를 내게 일깨워 준다. 다섯 시간 가까이 흙을 보듬고 주물러 배추 모종 심기에 황공할 정도로 어여쁜 밭두렁을 만들고 집에 올라와서는 열십자로 누워버렸지만 그저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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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정이 들었던지 '요즘 물까치떼가 안 보인다'고 보스코가 은근히 걱정을 한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요즘은 까치 몇 마리가 배밭을 드나들고 까마귀도 전봇대 꼭대기에서 까악 깍 위세를 부린다. 남원 최요한 선생에게 전화로 물어보니 새들도 역학관계가 있어 까마귀가 출연하면 까치와 물까치가 물러난단다. 또 까마귀는 배봉지를 쪼지 않는단다. 그리고 까치가 오면 물까치떼가 물러간다나? 시커먼 모양에 호감이 안 가던 동물이 그 전화 한마디에 갑자기 '귀하신 이조(利鳥)'로 반가이 모셔야 할 손님이 되었다.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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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는 사촌 여동생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겠다고 왔는데, 심술궂은 빗님이 바로 요런 날 행차하시겠다고 해서 토요일 우리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서 화엄사와 화계장터엘 가겠다고 성삼재를 넘어갔다. 몇 년을 별러 그 먼 길을 와서 겨우 두 밤 자고 다시 부리나케 돌아가는 휴가는 우리 세대에서 끝날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돈이나 일보다 삶의 질을 먼저 챙기기에 본인이 정말 원하는 바가 있으면 아무리 안정적인 직장도 아낌없이 버릴 용기가 있다. 사회생활엔 어려움이 없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나쁘지 않은 사고방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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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요일, 광복절이자 '성모승천대축일.' 제네바에 한인성당이 없어 개신교 한인교회에 다닐 때, "815일이 무슨 날이냐?"고 묻는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시아가 "성모승천대축일!"이라고 대답했다 친구들에게 웃음을 사고는 다시는 그 주일학교에 안 나갔다는데... 개신교 출신인 내가 오늘이 '의무축일'이라고 챙기고 미사참례를 해아 한다고 나서는 것으로 보아 오랜 신분 세탁으로 구교신자(舊敎信者)가 되어 있다


미루네서 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고 헤어졌는데 면역접종들이 끝난 나이들이어서 마음 편한 얼굴이다. 나로 인해 타인이 아프게 된다면 내가 아픈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라 나도 내일 2차접종을 받는다. 빵고신부에게서 이차를 교차접종으로 받고서 어제 오늘 심하게 몸살을 했다는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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