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81일 일요일. 흐리다 비


금요일. 새벽 다섯 시가 넘자 습관처럼 눈이 떠진다. 매일 새벽마다 서너 시간씩 밭일을 하다 보니 딱히 할 일은 없는데 잠을 깬다. 아래층 진이아빠의 트럭 소리가 난다. 그는 새벽같이 나가 열 시가 가까워져야 돌아와 아침을 먹고 한낮에는 집에서 더위를 피한다. 현명한 농사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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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밭으로 나가서 찾아보면 뭔가 할 일이 있겠지라면서 작업복을 찾아 주섬주섬 걸치고 있는데 보스코가 벌떡 일어나더니 옥수수대는 내가 쳐줄까?” 묻는다. 그  전날 산보 길에서 돌아오며 어둠 속에 패잔병처럼 서 있는 옥수수대를 베어내야겠다는 생각은 나도 했다 “당신 생각 아주 건설적인 생각이야!” 라며 남편에게 '돌격!'을 외치며 낫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머리칼 하얀 아기들을 등에 업고 있다 인간들에게 아기들을 다 빼앗기고 줄기 채 찢기고 꺾여 말라가는 옥수수대들의 이미지는 가련한 ‘몽실언니이다. 옥수수대 밑에는 옥수수 껍질들이 무슨 넝마처럼 널려져 있기 마련이어서...


같은 시각, 나는 휴천재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기로 나섰다. 왜 꼭 오늘 이 시간 꼭두새벽에 그 일을 해야 해?”라고 따지는 '성나중씨.' 나의 대답은 논리정연하다. “첫째, 나중에 한다고 당신이 해 줄 리 없고”, 둘째, 오늘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고”, “셋째, 하루 중 제일 시원한 시각이 오전 6시경이고”, “넷째, 제일 중요한 건 감동 앞 분리수거 통이 꽉 차 더는 놔둘 수 없어 비워야 한다.” 일사천리로 쏟아지는 대답에 감격한 전직 철학교수는 아내의 어록을 따로 만들어 철학총서에 첨가해야겠다는 표정이다.


보스코는 옥수수를 따낸 옥수수 대궁을 낫으로 치고 멀칭 했던 폐비닐들을 한 자루에 모으고 퇴비 봉지들을 한데 묶어 길가에 내놓는다. 나는 보스코가 정자 밑에 쌓아둔 잡동사니들을 군청에서 사온 규격봉투에 모아 담고, 감동 옆에 마련한 휴천재 쓰레기 수거장에 몇 달간 쌓인 쓰레기들을 다시 분리 확인하여 소나타에 싣고서 보스코랑 폐교된 문정초등학교정문 앞으로 내려갔다


학교 앞에는 동네 아짐들이 내다놓은 많은 쓰레기가 쌓였는데,저 엄청난 비닐들을 분리수거 했다 해서 과연 군청이 재활용을 하는지도 아리송하다. 쓰레기를 비닐이고 종이고 집앞이나 텃밭구석에서 그냥 태워버리는 아짐들이나 쓰레기차로 수거해온 봉지들을 내용 구분 없이 한데 모아 태워버린다고 소문난 지자체들이나 반-환경적이기는 마찬가지 수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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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산보는 허영감네 산소로 올라가서 주모경을 바치고 먼저 떠난 아줌마에게는 '라파엘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딸네가 교우여서 사실 입교를 준비했었다) 그 가족의 입교를 빌며 '기적의 성패'를 무덤에 살짝 묻고 성수를 뿌려드렸다기적이 일어나 허영감이 영세를 받으면 '라파엘'이라고 부를 생각이다


그 위쪽에 유영감네 납골묘가 석물로 마련되어 있다그곳까지 가서 기도를 해 드리고 묘소에 성수를 뿌려드렸다. 부인이 10여년전 돌아가신 뒤 남녀가 유난히 유별한 이 동네에서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은 거의 유일한 여자가 이 교숫댁이어선지 돌아가셔서 영감님이 더 가까이 계시는 듯한 이 기분은 하느님의 품이 그만큼 넓고 따스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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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에도 습관처럼 일어나 일복에 낫을 들고 나선다. ”오늘은 또 뭐야?“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보스코에게 축대에 자라오른 줄기와 덩쿨들을 걷어내겠다 하고는 내려갔다. 오이가 가뭄에 다 죽어가고 상추는 비실거린다. 부직포 위로 뻗어가며 신나던 호박 덩굴도 한더위에 사경을 헤맨다. 어제 산보 중에 본 들깨와 잡초도 다 말라버려 같은 운명이었다. 기후변화의 재앙은 잘사는 제1세계나 가난한 제3세계나 공평하게 내리고 있다. 어차피 인류는 함께 멸종되는 운명일 테니까... 저녁에는 보스코가 작심을 하고 호스를 텃밭으로 끌어내려 시든 작물에 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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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고산지대에서도 카모슈(산양)를 보는 건 대단한 행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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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기네는 돌로미티로 피서휴가를 떠났단다. 80년대초 로마에서 자라면서 해마다 알프스 돌로미티에서 여름을 보낸 추억이 뇌리에 남았는지 스위스에 살면서도 여름 휴가는 이탈리아 돌로미티로 가족을 데려간다. 그제 티치노를 방문하여 친구네를 찾아보고 어제 목적지에 도착했나 본데 오늘은 종일 산중에 비가 내려 집에 갇힌 채 아이들과 카드 놀이라도 하나보다. 거긴 인터넷이 잘 안 터지나 보다.


아범이 보낸 사진 속의 풍경들이 우리의 아련한 추억을 자아내지만 트렌토의 돈쟌카를로도, 산마르티노의 마리오도, 베니스의 까뽀 부부도 세상을 떠난 지금은 예전처럼 알프스가 우리를 잡아 끌지는 않는다. "그대가 있어야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든 곳일레라."는 노랫말처럼...1627651220232-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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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입추와 말복이 기다리는 8월에 들어섰다오랜만에 가림정에 미사를 갔다코로나로 함께 만나기는 어려워도 우리 마음속에 흐르는 정은 변함이 없다오가는 길에도 코로나로 지친 도회지 사람들이 휴가철을 맞아 자연의 품을 찾아드느라 이 산속까지 자동차들이 줄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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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이 여러 날 이어지는 삼복더위. 어제 낮에는 너무 더워 에어컨을 한 시간 정도 틀었지만 오늘은 그런대로 에어컨 없이 견딜만하다. 보스코가 모처럼 엊저녁 텃밭에 물을 주자 하느님께서는 "가뭄에 물은 이렇게 주는 거란다." 하시면서 오늘 오후 하늘에서 쓰시는 커다란 물뿌리개('소나기')로 휴천재 텃밭은 물론 지리산 골짜기와 능선의 모든 나무와 풀에 물을 주셨다. 


하느님이 주시면 물도 골고루 주신다("이랑에는 물 대시고, 흙덩이는 고르시고 소나기로 풀으시고, 새 싹에는 강복하셨나이다": 시편 64,11) 소나기 덕분에 기온도 많이 식었다. 2층까지 더위와 가뭄을 견디고 기어 오르느라 고생한 수세미도 비에 젖은 잎과 열매들을 흔들며 춤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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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여정' 속에서 한때는 거창, 한때는 산청에 확진자가 많이 나와 남의 눈치를 보았는데 요즘은 청정지역을 뽐내던 함양이 서부경남에서 확진자가 제일 많이 나온다고 자랑 아닌 자랑이다희정씨도 자기가 수영장 가던 날, 바로 앞 타임에 들어온 사람이 확진자로 밝혀져 2주간 자가격리에 들어갔노라고 전화했다. 그런데 자가격리를 하는 국민에게 국가에서 도시락 등 오만 가지를 다 가져다주고 격리가 끝나면 돈도 준다면서 "우리나라 좋은나라" 란다. 면역주사 맞지 말라고 선동하던 보수언론이 확진자가 1500명대로 발표되자 이번엔 현정부가 코로나 방역에 실패했다고 몰아대는 변덕을 보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건지...


북한 동포들도 비가 안 와서 땅은 타 들어가죠, 인민들은 먹을 것이 없죠, 코로나로 큰일 났지만 백신을 구할 수도 없죠... 하는 처지에 통일부가 모처럼 민간차원 원조를 허가했다는 뉴스가 떴다. 이웃 아닌 형제가 휴전선 저 편에 있으니까 평화가 더 절실해지는 순간이지만 '통일부'마저 없애버리겠다는 호전적 야당인사들의 국정 비젼이 참 한스럽다. 한반도에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북한에 핵무기 90개를 쏟아부을 좌표를 찍어놓은 나라가 있다는 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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