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29일 목요일, 맑음


이웃에 사는 경모씨가 남호리에 키만큼 자란 잡초를 예초기로 깨끗이 손질해줬다. 도시라는 밀림에서 일하다가 인간적인 삶을 찾아 온 가족을 데리고 탈출한, 이 동네에서 가장 젊은 남자다. 봄이면 여린 찻잎도 따서 차도 덖고, 서각도 하며 그림처럼 살고 있다. 딸 셋에 막내는 아들! 요즘 세상에 아이들이 넷인 점도 신통하고 맘에 드는데 내가 홀딱 반한 건 그 집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이다조선시대 양반 대갓집에서나 봄직한 아이들의 유교적 품성과 차분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엄마는 수학선생님인데 아이들이 말투나 행동은 완죤 문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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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그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초딩 4학년 세째딸이 나왔다. “모처럼 오셨는데 부모님이 출타 중이셔서 제가 차를 내겠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다도를 배운 길입니다. 마루로 올라오시지요.” 그미는 의젓한 팽주가 되어 의젓하게 차를 끓여냈는데 내가 인사말로 차맛이 좋구나.” 한 마디 했더니만 그럴 때는 '다향(茶香)이 좋습니다' 라고 하는 법이에요.”라며 의젓이 바로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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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은 둘째딸을 골목에서 만나 우리집에 잠간 들어오려므나.” 했더니만 폐를 끼칠까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며 그냥 갔다. 어딘가 다른 나라 특수교육 기관에서 특수교육을 받은 특수아동들 같아서 그 부모가 유난히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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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족은 물과 공기만으로 살아가는 신선인 줄 알았다얼마 전 마을 당산나무 앞에서 만난 경모씨는 얼굴이 구리 빛으로 타 있었다. 나는 때마침 남호리에서 김을 매고 돌아오던 길이기에 '지심 매는 게 너무 힘들다'느니 '예초기 돌릴 사람이라도 놉을 얻어야겠다'느니 했더니 "제가 요즘 하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산림청과 계약하여 사람들을 데리고 길이나 숲에서 풀 베는 작업이 자기 생업이란다


하도 반가워 남호리의 사정을 얘기하고 풀을 좀 깎아 달라 했다. 선선히 언제라도 해주겠다니 나는 한시름 놓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일 중에 가장 쉬운 일'이라고들 하지 않던가?


지난 주말 그가 남호리 땅의 풀을 깎아 줬는데 돌팍이 많아 예초기 날이 자꾸 튀어오르기에 보통 두 개 정도의 날이면 되는 일에 예초기 날 네 개나 썼고 기계가 망가질까봐 고생했단다. 그러면서 돌덩어리를 좀 주워내 군데군데 쌓아주면 다음 번에 벌초할 때 도움이 되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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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제 새벽에는 보스코랑 남호리 밭에 돌덩어리를 치우러 갔다. 윗머리는 지난 번에 대강 치운 터라서 두 시간도 못 채우고 보스코가 그만 가자고 보챘다. 여섯 시에 갔으니 나 같으면 아홉 시까지는 일을 했을 법한데 풀숲을 더듬어 돌을 주워 올릴 때 마다 우르르 덤비는 깔따귀떼는 중대 연대 사단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그물모자를 쓰고서도 나는 입술과 눈가를 물렸는데 보스코에게도 어지간히 성가셨던가 보다. 얼마나 지겨웠던지 싸간 아침도 집에 돌아와 먹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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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마루 식탁에 고급스럽게 차려진 아침을 먹다가 그가 묻는다. "깔따귀는 무얼 먹고 살까?" "식물의 즙액을 빨아먹지 않을까?" "그럼 사람의 피는 왜 빠는데?" "그건 인간에게서 나오는 즙액이 피라서가 아닐까? 모기처럼 동물의 피를 빨아야 암컷이 알을 낳고?" "그럼 사람들이 소나 돼지를 키우지도 않고 산짐승도 보기 드문 마당에 깔따구는 누구한테서 피를 빨아야 알을 낳을 수 있을까?" 


'아~ 어쩌나! 깔따귀의 산란을 걱정해주는 저 철학교수의 쓰잘데기 없이 섬세한 센시티브를?' 기가 막혀 우리 부부의 댓거리는 거기서 끝났다. 벌레들의 운명을 생각하는 일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번역하는 책상에서나 하게 두고 다음에는 남호리에 나 혼자 일하러 가야겠다는 충분한 이유가 생겼다. '참 남자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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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진이가 아들 한빈이를 데리고 여름방학을 보내러 왔다. 위아래층이 적막강산이었는데 아이 소리가 들리니 그 생동감에 집 전체가 살아있다고 느껴진다. 아이와 고양이는 따뜻한 곳을 찾는다지만, 한반이가 간간이 2층을 찾아와 초콜렛, 두유, 복숭아를 얻어가는데, 그 사랑스러움에 모든 걸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래도 사내녀석이라 살가움은 덜한데, 오늘 1000일을 맞았다는, 이엘리의 큰 손녀 윤서의 재롱을 보니 숨이 넘어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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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하나만 낳는 시대에 왜 딸을 낳겠다는지 이해가 간다. 이제는 여자가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대접받는 시대가 오긴 오는 것 같은데, 실생활에서, 사회 각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자리 잡은 여성의 점유율은 아직도 형편없다. 윤서가 어른이 될 즈음엔 세상이 많이 달라지길 바랄 따름이다. 문정권에 여성 유권자의 지지가 높다는 이유에선지 '여성부를 폐지하겠다', 현정부의 대북정책이 국민의 염원을 반영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와선지 '통일부를 폐지하겠다'는 야당 지도자들의 정치적 식견이 놀랍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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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530분엔 저녁기도(성무일도)를 하고 6시에 저녁을 간단히 먹고 휴천강 건너 송전길을 걸으며 로사리오를 바친다.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만 있는 보스코를 걸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송문교를 건너면 다리 위에 강바람이 일어 하루의 더위를 잊게 한다휴천면 기온은 서울보다 4~5도가 낮아 지리산 생활이 곧 피서가 된다. 오가는 길가의 꽃들이며 하루살이 같은 벌레들을 저녁꺼리로 사냥하는 고추잠자리들이 어지럽게 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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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불산 비탈에 돼지막이 있어 저기압일 때는 냄새가 풍기지만 '가난한 젊은이가 세를 얻어 돼지를 키우는 중이라, 하라고도 못하고 하지 말라고도 못한다'는 게 우리가 산보길에서 만난 그 동네 노인의 탄식이다. 임실 김원장님댁 바로 이웃이 돼지막이라 날라드는 파리떼와 사시사철 문도 열 수 없는 냄새로 고통을 받아왔는데 임실군의 보상과 조처로 올가을에는 그 돼지막이 폐쇄된단다. 가까운 임실치즈마을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워낙 폐가 되기 때문이란다.


저녁 산보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시 강으로 내려가 강물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다 보니 예전에 이 강가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새롭다. 그 맑고 깨끗하던 물은 물이끼로 미끈미끈 초록으로 변색되고 말아 지리산 심산유곡까지도 자연환경은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있어 자손들에겐 뭘 물려줄까 한심스럽다. 


저녁 강 물결 위로 지난 세월 휴천재를 왔다간 친구들의 추억이 가물가물하다. 큰물이 지면 강바닥도 모래에 씻겨 잠시 되살아나듯 다녀간 벗님들도 가끔은 내 생각을 해주겠지 하는 바램이 여울져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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