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18일 일요일, 맑음-흐림-그리고 천둥번개와 비


서울은 내가 자랐고 청춘을 보냈고 두 아들을 낳아 키고향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고향은 모습과 향기를 잃었고 거칠다 못해 난폭해진 투견이 되었다. 서울에서도 북한산-도봉산이 마주 보이는 산골짜기이고 야트막한 서민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이동’(행정상으로는 쌍문1)에서 40년 넘게(1978년부터) 한 집에서 살아온 터인데, 최근엔 갈 때마다 더 서먹해지고 더 낯설어진다. 보스코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색이다.


퍼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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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는 워낙 내성적이고 매사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어서 나이 들수록 앞장서기를 더욱 싫어하다 보니 옆에서 그가 할 일을 내가 일일이 챙겨야 하는데, 그가 하는 말은 물론 그가 먹는 생각까지 알아 맞춰 거들어야 하니 여간 쉽지가 않다. 최근 몇 년은 3개월마다 서울 가서 진찰받고 석 달 치 약을 타거나 처방을 받아야 하는 병원스케줄 또한 번거롭다. 지난 수요일은 보훈병원 심장외과 진료와 약 처방, 목요일엔 은평성모병원 호흡기내과 진료와 양압기 처방을 받았는데, 서울이 코로나로 하 수선한 터라 80영감 혼자 다녀오랄 수도 없었다.


게다가 40년 넘게 살아온 동네가 헐리고 공공주택 아파트로 개발된다는데 찬성하든 반대하든 제바로 선택을 해야 한다는, 잘 모르는 이웃도 도와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야 백번 맞지만, 법령을 읽어 공부하고 이런 문제의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판단하자고 사람들을 찾아다니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우선 15일에는 은평성모방원을 다녀오는 길에 마을 재생전문가로 삼양동 빨랫골에서 현장활동을 하는 김성훈 목사를 찾아가 상의를 하고 왔다. 그리고 16() 오전에는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가서 공공주택특별법을 발의하여 제정케 하고 629일에 개정안까지 통과시킨 김교흥 의원실 보좌관한테서 이 법률의 의도와 진행과정, 법과 시행령(바로 그날 16일에 시행령 초안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국토부에서 준비 중인 시행규칙까지 세밀하게 듣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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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이 사업으로 주민의 권익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법률적 행동을 하는데 도움을 줄 전문변호사를 만나러 서초동으로 가서 오후 3시의 면담을 기다리며 어느 카페에 들어가 바오로딸 수녀님네 책자(최근 보스코가 번역한 원고)를 펴들고 윤문을 했다. 무엇 하나에도 필이 꽂히면 끝장을 보는 보스코의 집념이자 투지이기도 하다. 천주교 인권위의 자문위원으로 이름이 올라있는 보스코는 인권위에 가담한 그 변호사에게서 기꺼이 협조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는지 만족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집념의 사나이가 가는 곳마다 차로 실어가고 동반하고, 식사시간이 안 맞으면 차 안에서 간식이나 점심을 먹이는 등 모든 걸 챙기는 일도 내 몫이니.... “당신은 무슨 권리로 이토록 날 부려먹는 거야?”라고 따질라치면 당신은 내 동지잖아?”라는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그의 입에서 나오며 도대체 미안하다는 구석이 안 보인다. “나 당신 동지 안 할래!”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삶까지 '동지'하는 터에 '이런 동지쯤이야' 그냥 견뎌야 할 숙명 같기도 하다(더구나 우리 '꼬맹이 딸'도 같은 처지라서).


새벽의 서울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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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공공주택특별법의 절차와 성패를 두고 가장 염려하는 일은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인데 보수언론과 국힘집단이 거꾸로 책 잡아 선거마다 판세를 뒤집을까 하는 점이고, 가난한 쌍문동 이웃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더 변두리(입이 싼 어느 정치인의 이부망천(離富亡川)’은 이미 옛 이야기여서 저 경기도 끝자락)로 내몰릴까 하는 걱정이다. 이럴 때 말남씨가 있었으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미가 너무나 아쉽고 너무도 그립다.


금요일 밤 큰딸이 전화를 했다. 토요일 아침 우리가 지리산으로 돌아가는 일을 걱정하여 토요일이면 코로나로 억눌린 일상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모조리 서울을 탈출하는데 어떡해요? 새벽 다섯 시 이전에 꼭 떠나세요.”라고 신신당부했다. 토요일 4시에 일어나 준비를 했는데도 5시 조금 넘어서야 우이동 집을 나서면서 이런 시각에 누가 거리에 나와 있을까 했는데 웬걸, 한길마다 차가 가득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부지런함을 누가 따라갈까 감탄스럽다. 그래도 6시가 되어 구리ㅣC에 도착하고 얼마 후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지리산에 반은 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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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휴게소에서 싸간 아침을 먹고 내쳐 달려서 함양에는 10시에 도착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휴천재에 도착한 건 처음이지만 어제처럼 새벽 일찍이 서울집을 나선 것도 처음이었다. 아무튼 하루를 옹글차게 쓸 수 있어 좋았고, 오자마자 텃밭에 가서 오이 가지 도마도 고추 옥수수를 한 소쿠리 따 안으니 휴천재가 바치는 환영의 꽃다발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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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세번째 주일은 본당신부님이 공소에 오는 날로 저녁에 미사가 있다. 5시에 일어나 에브리데이 홀리데이’(날마다 노는 날)인 우리는 텃밭으로 내려가 나는 두럭과 이랑의 풀을 뽑고 보스코는 빈터와 배밭에 예초기를 돌렸다. 많이 놀다 왔더니 밭에서 풀들도 신나게 놀고 있었다. 서울 가기 전 뿌려 놓은 루콜라와 쑥갓이 제법 예쁘게 올라와 있다. 여름 텃밭 농사에서 걔들을 지켜내려면 풀과의 전쟁이다


우리 텃밭 옆 유영감네 볏논은 그 위에 구장네 논이 너무 말끔히 관리가 되어 더 꺼벙해 보인다. 주인이 있을 때도 몇 해 전부터 주인이 정신줄을 놓아 엉성했는데, 매일 논두럭을 파내던 주인마저 떠나버린 농토는 영락없이 엄마 없는 아이다. 10여년 후면 적어도 이 문정리 산비탈은 묵정논과 묵정밭으로 변하여 칡넝쿨만 무성할 풍경을 생각하면 참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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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가 저녁 730분이라고 생각하고 공소에 갔는데 7시였나 보다. 성가도 없고 그렇지 않아도 짧은 미사에 영성체만 하고 오자니 코로나로 망가진 모든 일상이 처연하다. 지금 전 지구가 폭염, 폭우, 폭풍으로 시달리는 기후를 우리 인류가 어떻게 풀어가는지 하늘이 지켜보고 계신다


미래학자, 기후학자, 프란치스코 교황을 비롯한 지성인들이 충분히 경고해 왔지만 사람들은 '돈벌어' '쓰고 버리기'에만 급급하다. 유럽에 고대부터 전해오는 신화처럼, 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킨 거인족’(타이타닉)의 이름을 감히 따서 제작한 서구 문명의 타이타닉호가 통째로 침몰하는 중인데 사람들은 그저 "? ! ?"하면서, "누가 어떻게 해주겠지!" 하면서 물속으로 함께 가라앉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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