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13일 화요일. 맑음


일요일 밤 무서운 빗속에 찾아든 속리산의 아침은 염치없이 고요했다. 호텔 창밖의 나무들도 비바람에 축 쳐져 있다가 물안개가 깨우자 수선수선 이슬을 털어낸다. 코로나 4단계가 시작되어선지, 아니면 비 내린 뒤 월요일이어선지 호텔도 속리산 길거리도 텅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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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 뭔가 먹어야 하는데 열린 커피숍이 없다. 1973년 우리가 결혼하던 해에 다녀갔으니 거의 50년 만에 찾아간 골짜기다. 저 옛날에는 속리산관광호텔이라고 꽤 괜찮은 관광시설이었는데, 이제는 낡은 시설 곳곳이 우리의 늙은 모습 그대로여서 오히려 연대감을 준다. 경영난으로 레이크힐스이라는 호텔 체인으로 넘어갔다는데 지금도 별반 다를 것 없이 썰렁해서, 더구나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아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월급이라도 나올까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마을 일자리로 안전복을 입고서 길거리를 청소하는 할매들이 쓰레기 봉지와 저는 다리를 함께 끌며 두리번거린다. 마을 끝에 가서야 카페라고는 썼는데 전혀 바리스타처럼 안 생긴 아저씨가 마련한 라떼랑 뻣뻣한 케익 한쪽으로 보스코가 엊저녁부터 비웠던 위장을 달래고 저 추억의 날 저녁나절에 한 바퀴 돌았던 법주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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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간이라 관광객은 없었고 표 파는 입구에서 어른 5000, 65세이상어르신 무료라고 써있어 호주머니를 뒤지는데, '찾으실 필요 없어요. 그냥 들어가세요.'란다. ‘이젠 내 얼굴도 주민증이구나. 그만큼 폭삭 늙었구나.’ 50년전 그 풋풋한 새악씨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디 5000원이 아깝겠는가? 그 두 배라도 지불하지.’


그때 법주사를 둘러본 기억은 거의 안 나고 오늘 본 풍경도 앞으로 50년 후라면 하늘나라에서나 내려다볼까? 대웅전 삼세불(三世佛) 부처님들의 열반에 드신 평화로운 얼굴 앞에 우리 둘도 무념무상으로 편히 앉아 긴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아름다운 시간에 감사했다. 인생은 무상하지만 사랑만이 그 무상함을 따스한 기억으로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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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경 법주사에서 내려와 호텔식당에서 평생 한번만 먹고 싶은 맛없는 꽁보리밥을 먹고 추억을 가방에 주섬주섬 꾸려 서울로 떠났다. 서울은 과연 엄청 습하고 덥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덥기 전에 보스코는 잔디를 깎고 나는 마당의 시든 꽃과 화단 안쪽 풀을 뽑았다. 우리집에서 크는 꽃이나 풀은 조상대대로 수십 년의 역사(1978년부터)를 간직하고 있다. 물론 같은 식물이 긴 시간을 살아오지는 않았더라도 그 자손의 자손이 우리와 얼굴을 익히며 지내온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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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루드베키아와 큰나리, 끈끈이대나물이 마당을 장악했고 담장 너머로는 능소화가 화려하게 피고 있다. 아마도 내년에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면 어쩜 올해가 생존의 마지막 해일지 모르기에 여한이 없으리만큼 흐드러지게 피었다. 왜 우리에겐 사라지는 것들이 더 아름다울까?


오늘 점심엔 빵고 신부가 사뽀로라는 곳에서 아버지 팔순에 아들 대표로 와서 점심을 사기로 했는데 코로나 4단계가 발령나자 집에서 피자나 구어먹자는 제안을 해왔다. 우리 셋이서만 먹기엔 좀 허전한 잔치여서 딸 넷을 대표해서 이엘리를 부르고 친구들을 대표해서 한목사를 불렀다. 부산 좌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번 주간을 팔순주간으로 만들어준 분들이 있어 아들들이 멀리 있어도 외롭지도 않고 보스코의 벌린 입도 다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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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으로 이웃집 지붕들을 본다. 지붕과 지붕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앞집 지붕 밑으로 옆집 지붕이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들어와 산다. 그러자 앞집에서는 나무를 심어 비스듬이 키워 이웃집을 점령하게 했다. 아파트가 서면 우리 땅 60여평에 20여 세대가 함께 올라앉아 산다니 뜻있는 '땅나눔'이 되겠지만 저런 인간적인 기 싸움도 사라지고 옆집에 누가 사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끼리 낯선 나날들을 보내려니....


가난한 우리 인생에서 행복이란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따라서 타인은 우리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의 표현을 빌어 타인은 구원이다!”


서울집 앞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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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집 뒤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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