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4일 일요일, 아주 맑다 흐려짐


금요일 이른 아침. 나라면 5시에 일터로 나갈 시각이지만 드물댁한테까지 그러자기에는 무리인 듯하여 보스코의 아침을 챙겨놓고서 우리 아침을 싸들고 6시에 드물댁을 찾았다. 그미는 글을 몰라 '여섯씨!'하는 핸폰 소리에 잠을 깨어 날 기다렸단다. 글을 몰라도 전혀 불편함 없이 잘 산다. 그일로 열등감을 느끼거나 무슨 필요를 느끼는 일도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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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팔자에 순응하는 모습은 안타깝지만 그미의 얼굴은 언제나 태평하고 무던해 보인다. 동네에서 남을 도와 허드렛일을 해주는 사람도 그녀가 유일한데 그것도 그미의 부지런함과 남에게 열린 마음이 있어서다. 이런 심성은 교육을 받았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돈으로 살 수도 없다.


남호리 밭을 둘러본 드물댁은 나더러 혼자서 많이 했고마!” 한 마디를 남기고 신선초  밭 고랑을 종횡무진 움직이며 잡초를 토벌한다. 내가 꾀를 내어 그만하고 일어나려 하면 저 감는 것들(환삼덩굴, , 나팔꽃 따위)은 지레 없애야 혀.” 하고 나선다. 마디마다 뿌리를 내려 1m도 더 뻗어나가는 달개비를 집어 들더니 요건 독아지 위(독뚜껑)에서도 크는 놈이여.”라며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추자나무(호도나무) 옆에 돋은 풀도 매줘야 나무가 잘 커.'라는 훈수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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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미 덕분에 10시까지 4시간 동안,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까지 열심히 낫을 휘둘렀다. 싸 간 아침을 둘이서 배불리 먹고 일어서니 10시반. 이렇게 남호리 신선초밭을 두 벌 맸으니 한번만 더 매면 내년부터는 신선초 혼자 홀로서기로 자신을 지켜낼 것 같다.


이렇게 흙일을 하고 오면 꼭 해내야 할 일은 옷(황토염색에 가깝다)은 물론이고 연장을 깨끗이 씻어 말려 제자리에 거는 일. 엊그제 휴천재 텃밭을 손질하고 밭에 괭이랑 갈퀴 그리고 낫을 내팽게치고 가버린 보스코에게 잔소리를 좀 했다. “농부나 목수는 모름지기 연장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 “나처럼 명문 '함양농업대`를 다니며 우수한 교사 하소장님에게 사사 받은 사람은 정신과 태도에서 당신과 다르다.” “... ...” “옷과 토시와 장갑까지 이렇게 빨아서 널고 나면 다음에 무슨 일이 있어도 거뜬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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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끊이지 않는 설교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그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지난번 텃밭에서 루콜라 씨를 받아 잘 말렸는데 흙이 많아 보여 물로 씻었다. 그러고선 쨍쨍 햇볕에 말렸더니만 씨앗에서 끈적끈적 진이 나와 한데 엉기고 말았다. 봉재언니 얘기로는 씨앗을 젖은 상태에서 그냥 심을 수는 있지만 말리면 안된단다. 그래서 귀한 씨를 말려 부침개를 해놓았다는 보스코의 평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 이층 데크에 놓아두었던 루콜라씨 말린 그릇, 부침개에서 떨어진 씨앗은 그동안 물속에서 고스란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자연의 질긴 생명력은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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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휴천재 배나무 밑에 자라는 민트를 조여오던 까마중, 소리쟁이, 바랭이, 강아지풀, 수쿠렁을 제거하느라 새벽부터 9시까지 낫을 휘둘렀다. 비와 땀이 섞여 온몸이 시원하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보스코의 예초기에 넘기고 집으로 올라왔다. 비를 맞으며 밭일을 하는 건 특별한 해방감을 준다. 이렇게 사흘 연달아 새벽노동을 하고 나니 남호리와 휴천재 장마전 지심매기는 대강 마무리되었다.


어제 하루 장마비가 앞 논에서 목청 높이는 개구리 소리만큼 시끄럽에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했으니 오후에는 책을 봐야겠다고 했더니 이숙인박사가 조선시대에 그 틈에서 ''로 존재했던 52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또 하나의 조선』(한겨레출판)이라는 신간 서적을 보내왔다. 그동안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들을 다듬은 책이다. 다산연구소의 칼럼집 '다산포럼'과 '실학산책'에 글을 쓰면서 보스코와 아는 사이로 많은 관심을 받는 필자란다


http://www.edasan.org/sub03/board02_list.html?bid=b33

http://www.edasan.org/sub03/board03_list.html?bid=b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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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52명의 여자들은 다양한 위치에서 일정한 꿈을 안고 서로 다른 현실을 살다 간 사람들이다. 조선시대에 여자사람들이 살아간 모습들은 재미라고 하기엔 너무 슬프고 놀라워 잠도 못 자고 읽고 읽었다. 우리는 현대에 태어나서도 과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으며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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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7월 첫 주일. 임신부님이 미사를 드리러 오셨다. 임신부님댁(일명 '가림정공소' 자칭 공소회장 이사야, 공소총무 미루, 식복사 봉재언니까지) 식구가  문정공소로 왔으므로 미사 후 휴천재 식당에서 아침을 들면서 담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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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에는 문정공소 식구들도 꽤 많았다. 엄마를 위한 연미사 지향을 청하여 미사를 올리고 공소 식구들의 조의를 받으며 울 엄마가 떠난 걸 다시 절감한다. 엄마가 가계실 저산 저너머는 과연 어떤 곳일까? 내게 가까운 사람들의 숫자가 여기보다 저기에 더 많아지면 여기보다 저기가 내게 더 친숙해질까? 그러면 죽음도 조금 더 고맙게 느껴지고 이승의 문지방을 넘어가는 우리의 발걸음도 조금 더 가벼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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