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20일 일요일, 맑음


금요일 이주여성인권센터이사회가 있어 참석했다. 올 수 있는 사람은 오고 불가능한 사람들은 현지에서 동영상으로 참석하였다.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좋다. 비록 비대면 영상통화도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얼굴과 얼굴은 실물을 보아야 성이 차는데, 그 점은 아마 내 구세대 후진성인 듯하다. 일년 절반은 세계를 헤매던 빵기도 제네바에서 매일 화상회의를 한다는데 그게 더 바쁘고 전세계를 두루 연결하다보니 밤낮으로 바쁘단다. 할 일은 하고 있다지만 현장답사와 파악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 그 점은 크게 아쉬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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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리 선생이 김상림 선생과 한목사와 나를 보겠다고 숭인동으로 왔는데 내게 일이 생겨 일찍 가야 한다니까 우리 집까지 쫓아 왔다. 친구는 어른이나 아이나 이렇게 몰려다니며 친구 따라 강남 가는사인가 보다. 보스코도 함께 우이동 두부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헤어지며 다음 내가 상경 할 때 또 만나자며 약속했다. 친구를 이리도 좋아하는 내가 산속에서 두 달 반을 별탈없이 지내는걸 보면 신기하다는 말들을 하지만 아마도 자연이 벗이 되어주기에 가능한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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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패친으로 청담동에 사는 방스텔라가 모친상을 위로할 겸 자기가 대모로 삼겠다는 나와 상견할 겸 나를 점심에 초대하였다. 토요일 미루가 강추한 식당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그 집에 가서 스텔라의 작은 갤러리를 방문하였다. 그 집 식구 전부가 다재다능한 분들이고 가족끼리 각별히 끈끈하게 엮여있어 예술가의 향기가 곳곳에 가득했다. 배 아프지 않고 낳은 딸들에 뒤이어 성사거행도 없이 생겨난 대녀가 따뜻하고 배려 깊게 챙겨주는 선물을 한아름 안고 우이동으로 돌아왔다.


어딜 가나 지고 다니고 들고 다니는 일은 오지랖 넓은 나의 숙명이지만 대녀가 준 김치를 끙끙 메고 돌아오면서 어깨가 다시 망가질까 걱정했는데, 전철역 입구에 유미엄마’(우리 서울집 골목 입구 구멍가게 쉼터의 여주인)가 수호천사로 기다리고 있어 어려움 없이 집에까지 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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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회갑잔치를 하나? 그러나 우리 다섯 중 막내가 대표로, 마지막으로 회갑 잔치를 한다고 화전의 자기 집으로 형들과 우리 부부를 초대했다. 우리는 'X만한 청춘'이 철없이 환갑잔치한다고 놀리거나 쥐어 박았지만 여전히 귀여운 막내다. 형들이 꽃다발과 면도기와 함께 돈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고, 나는 케잌과 양주를 안겼다.


그집 작은아들 원이가 엄마랑 같이 아빠의 환갑상을 차리고 노래를 부르며 재미있었다. 돌아가신 엄마가 원하시는 게 우리들이 우애있게 사랑하며 함께 지내는 일이라고 여겨 다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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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일 아침에 세종시에서 만나볼 사람이 있어 교통체증을 피하려고 오늘 대전으로 미리 내려왔다. 살레시오 정림동 수도원에 숙소를 얻었다.   빵고신부 동기 위신부가 원장 겸 수련장으로 있고 장신부님이 경리이며, 최수사님이 '나눔의 집' 책임자로 계시기에 내집처럼 편하게 지내도록 배려해주었다. 살레시오회의 손님에 대한 환대는 누구나 배울 만하다.


이곳은 청소년 수련원이자 피정센터이지만 코로나 사태로 일년 넘게 청소년들의 소리가 사라진 건물에 우리 둘이서 방을 얻어 들어가니 코로나 팬더믹의 직격탄을 맞은 많을 이들의 아픔이 구체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우리가 대자연에 저질러 온 잘못을 돌아보고 땅을 치며 창조주께, 가난한 이웃들에게 그리고 어머니인 대지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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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정옥의 제주 살이

나 전순란은 제주도 중문에서 태어났다(1951). 아버지가 6.25 전부터 제주에서 교장으로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오빠도 나도 내 동생 호천이도 제주에서 태어났건만 아버지는 우리를 모두 경기도 가평 현리를 주소로 호적에 올리셨다. (‘전라남도 제주군이 마음에 안 드셨기 때문이었느냐고 오빠한테 물었더니 호적등초본 뗄 적마다 제주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단다.)


일본에서 니혼대 법과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우리 아버지가 해방 전후 연달아 고시합격에 실패하자 아버지의 지인들이 서울 어느 조그만 경찰서 서장으로 발령받게 하려고 추천서를 작성했는데, 사위가 술을 좋아하는 건 좋았는데 신혼 초에도 주사(酒邪)를 하며 쉽게 노하더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외할아버지가 개입하여 추천명단에서 사위 이름을 빼버렸단다. ‘평소에 주사가 있는 사람이 총을 쥐면 위태롭겠다고 염려해서란다.


그 대신 사위를 교육계로 진출시키기로 작정하고 문교부장관에게 천거하여 제주도로 발령나게 손을 쓰셨단다. ‘교장서리 교감이라는 직책으로 제주 중문중학교에 발령하고 1년 뒤 교장으로 정식 발령을 내렸다. 아버지는 후일 우리에게 사령장을 보이면서 자랑하셨다. “이건 도지사가 발령한 임명장이 아니라 문교부장관이 발령한 임명장이야!” 해방 전후 위계 없던 세태의 증거였다.


제주에 소위 ‘4.3사건이 나자 이북에서 월남한 전문규 교장의 가족은 위태해졌단다. 그때 국군제1훈련소가 제주에 있었고, 채명신 이세호 등 부대책임자들이 아버지 집안과 형님 아우 하던 지인이어서 훈련소 부대 안에 공간을 마련하여 우리 부모님을 안전하게 거처하게 해주었단다. 우리 오빠는 그래서 대한민국 역사상 군막사에서 태어난 최초의 민간인이었음을 자랑으로 여기며 지금도 태그끼아재로서 활약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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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발발하면서 서울에 남아 있던 외할아버지(조용대)는 인민군에게 붙잡혀 납북인사로 끌려가셨다. 할아버지의 납북 사실을 확인하고서 외할머니네 식구 전부가 위험을 느끼고 1.4후퇴의 혼란을 타고서 둘째 선옥이모의 기지와 용기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제주로 피난 온 이야기는 이모 말대로는 대하드라마가 되고 남는다.


하여튼 외갓집(외할머니, 이모 셋, 작은 외삼촌[큰외삼촌은 서울에서 인민군에 끌려갔다 포로가 되어 거제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은 제주에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고, 큰아버지(전성규)네 가족 5명까지 합류하고 심지어 작은아버지(전한규)도 곁들여 장장 열다섯 식구를 부양하느라 조검사 딸 조정옥은 하루 종일 부엌에서 솥뚜겅을 운전해야만 했다. 이번 상중에 만난 작은외삼춘은 제주 시절 큰누나의 고생을 가까이서 지켜보았고 때로는 끼니 밥상에 큰누나 밥그릇은 아예 안 보이던, 70년 전 추억을 더듬으며 돌아가신 큰누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계속]


외할머니, 엄마와 나, 막내이모, 그리고 오빠의 추억(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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