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도제 기원문


2001년 6월 24일, 한국전쟁 발발 반세기만에 지리산에서 좌우 투쟁 당사자들이 모여 

천도재를 올렸다. 이 글은 천주교측에서 발표할 기도문으로 성염이 작성하여 제출한 것이다.

 

금수강산 한반도의 오악(五嶽) 중에도 가장 어머니다운 자태를 띤 두류산, 그러나 지난 반세기 가장 서글픈 저주와 원망이 골골이 서려있는 이 지리산 자락에 무려 반세기가 지나서야 오늘 영령들께 추모와 화합의 천도제를 올립니다.


저희는 민족 해방의 기쁨도 채 가시기 전에 손바닥만한 한반도가 미쏘의 농간으로 분할 점령되고 국제연합의 결의를 묵살한 채로 남북이 두 나라로 갈라지는 비극을 목격하였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피흘려 죽어가신 영령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항일투쟁부터 계승한 사회주의 이념으로 한반도 통일과 보다 나은 민중의 삶을 추구하는 명분으로 무장 투쟁을 하다가 전사하셨습니다. 대다수의 희생자는 조상대대로 산비탈을 가꾸며 살아오던 가난한 민중들로서 좌우의 이념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국방군과 경찰들의 손에, 그리고 때로는 빨치산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여 무덤도 갖지 못한 여기저기 구덩이 속에서 백골로 화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비토벌이라는 명령을 받고 이 산에 투입되었다가 전사한 군경들도 계십니다.


이 모든 비극은 하느님이 가장 증오하시는 분열과 미움과 살인이라는 범죄로 점철된 역사이므로, 겨레의 운명과 죄과를 저희의 운명과 죄과로 여겨서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은 하느님과 겨레와 특히 희생자들의 유가족 앞에서, 동포살인자들과 그 집단들을 대신하여 (더구나 비무장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그 비굴하고 잔악한 범죄자들은 결코 이 자리에 나서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저희의 가슴을 치고, 영령들께 저희가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반세기가 지난 이제, 남은 자들이 서로 화해하자고 저희끼리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이 제단에 서 있습니다.


오로지 성스러운 가르침과 선한 행업만을 하면서 민중적 삶을 살았던 나자렛 사람 예수께서, 억울하게도 반란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셨음을 그리스도신자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신자들은 나자렛 사람의 그토록 수치스럽고 원통한 죽음으로 그분이 그리스도인들과 만민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사실을 또한 자기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지리산 주변의 모든 희생자들의 영령이 하느님의 품으로 천도되어나자렛 사람 예수의 구세적 죽음에 자신들의 죽음을 합쳤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좌우의 이념을 갖고 산화하셨든지, 이념적 투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억울하게 학살당하셨든지, 돌아가신 영령들께서는 이 지리산 능선과 계곡과 자락에 피를 쏟았고 뼈를 묻으셨으므로, 이 지리산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기운으로 화하셨으며,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품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로운 눈으로 살아남은 겨레와 그 운명을 걱정하고 보살펴 오셨고, 한많은 이 나라의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어 오셨으리라는 것이 저희 천주교 신자들의 믿음입니다.


영령들께서는 사회주의 이상의 신념 속에, 자유대한이라는 구호 속에, 혹은 오로지 뼈아픈 고문과 죽음의 공포 속에 죽음을 맞으셨더라도, 무상한 생명이 끝나는 그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영혼 밑바닥에서 영령들께서는 고난에 찬 이 겨레와 서럽게 살아갈 유가족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앞에서 그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으리라는 것이 저희의 바램입니다.


영령들이시여, 남녁땅에서만도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 40년에 긍한 군사독재가 지나갔고, 남북간의 대결과 증오도 6.15 남북정상회담과 양측의 화해 노력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불안한 국제정세하에서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성사되어 간다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지리산 일대에서 희생되신 영령들의 죽음의 희생과 산 자들을 위한 사랑이 밑거름이 된 결실임을 저희는 압니다.


지리산의 넉넉한 품 속에 잠든 영령들이시여, 갈기갈기 찢기고 나누어진 남북의 상처가 이제는 낫게 구천에서 저희를 보살펴 주시고, 이념으로 갈라져 싸웠던 남과 북이 하나라는 겨레 사랑으로 다시 화해하게 저희를 북돋아주시며, 미쏘가 사주하는대로 저희를 미쳐돌아가게 만들었던 이념투쟁의 악령을 물리치고 이해와 사랑과 용서로서 남북이 서로를 얼싸안게 저희를 다독여 주십시오. 38군에 펼쳐진 이 지리산 노고단에서 저희가 영령들께 기원하는 바는 영령들께서 잠들어 계신 이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사는 영남인들과 호남인들이 서로 마음을 열고 서로 오가면서 믿고 사랑하여 민족화합의 또다른 기반을 마련케 도와주십사 하는 바램입니다.


지리산에서 쓰러지고 이 산에 뼈를 묻으신 영령들이시여, 아직도 원한으로 떠도는 영령들이 계실까 하는 인정에서 천도제를 올리는 저희의 정성을 굽어보시어, 이 한반도의 깊숙한 뿌리 속에서 고이 안식을 누리시면서 땅위에 살아남은 민족과 나라의 역사가 올바로 나아가도록 보살펴 주시고 여기 모인 저희들에게 그 일에 투신할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