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27일 목요일, 흐림


수요일 아침. 보스코가 먼저 나선다. ‘그동안 비가 여러 번 와서 남호리에 칡이나 산딸기 덩쿨이 얼마나 자라고 뻗었는지 궁금하니 오늘은 가서 손을 좀 보자.’ 나야 그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오기를 기다리던 터라 아침을 서둘러 먹고 치우고 9시도 못 되어 밭일을 시작했다. 그는 괭이를 들고 칡과 복분자(산딸기: 날카로운 가시가 돋는 줄기가 4~5미터까지 뻗는다) 덩쿨을 뿌리채 토벌하고, 나는 휴천재 텃밭에서 옮겨다 심은 신선초 주변 잡초를 낫으로 맸다. 신선초를 따라간 잡초가 신선초보다 더 실하게 자리잡고 열심히 퍼지고 있어 나도 열심히 낫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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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를 베어다 말려 차를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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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미나리, 돌나물로 반찬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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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서 남호리 밭의 윗축대 밑이나 아랫축대 위로 옥수수 씨앗도 심으려고 했는데 진이엄마가 어디 고라니나 멧돼지 좋은 일 시킬 거 있어요?’ 말렸을 뿐더러 오늘 풀을 매면서도 사방에 멧돼지가 칡뿌리 주변을 주둥이로 파 놓은 구덩이들을 보니 비록 짐승들에게도 희망 고문을 하는 짓 같아서 옥수수나 고구마 심고 싶은 마음은 접었다.


어제 다섯 시간 동안 낫을 휘둘렀더니 팔을 들 수가 없고 보스코는 괭이질과 낫질로 칡을 제거하느라 허리를 펼 수가 없단다. 진이엄마가 남호리 농장 체리가 익었으니 따드세요.’ 했지만, 일을 마치고 나니까 체리 따러 올라갈 힘도 없어 그냥 돌아왔다. ‘이대로 하다간 골병들어 죽겠구나!’ 싶어 진이엄마에게 물었다. “오전 일만으로도 우린 이리도 지치는데 진이엄만 오전오후에 일하고, 그것도 어떻게 날마다 하느냐?” “가끔 하면 그리 고되지만 매일 하면 견딜 만해요.” 몸이 적응한다는 얘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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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할매들의 몸고생을 몸으로 체험한 나절이라서 오후엔 냉장고에 사다 둔 하드를 꺼내들고 밭일을 하는 아짐들을 찾아나섰다. 논에 벼를 떼우는 구장댁에게 한 개, 윗밭에서 옥수수 옮겨심던 태우할매한테 한 개. ‘너무 목이 말랐는데 고맙고로!’ 하시는 할매가 얼음과자를 드시면 목이 더 마르실 것 같아 집으로 내려와 수박과 물병을 들고 다시 올라갔다


할매는 수박 먹다 가려낸 검은 씨앗을 밭고랑마다 박아 넣으며 가실에 수박 열림 따다 먹어!” 하신다. 땅바닥을 안방 아랫목처럼 기어다니며 옥수수를 옮겨 심는 모습을 보니 저렇게 온몸으로 땅과 흙에 밀착해야 농사의 최고봉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엄니가 심는 건 수박이나 참외 심지어 토마토까지 더할 나위 없는 최고 상품이 된다. 저렇게 넓은 밭, 저렇게 많은 밭고랑도 모두 엄니의 손으로 풀을 맨다. ‘저집 아들 잉구는 할매 없으면 정말 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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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는 엄척이나 알뜰하다. 고구마 싹을 심을 때도 남들은 싹 하나를 푹 심는데, 넷으로 토막 내서 한 구멍에 하나씩 심으니 네 배를 심는 셈. ‘복수박을 심고 싶은데 장에 나갈 틈이 없다.’ 하셔서 오늘 장날에 읍내 나간 김에 복수박 여섯 포기와 토마토 여덟 포기를 사다 드렸다. 심지도 않은 옥수수도 저 집 밭에서 원 없이 따다 먹는 터라서 모종을 사다 드리는 저것들도 크고나면 실상 다 내 꺼다!


527! 새벽에 빵기가 전화를 했다. “엄마 절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큰아들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정작 오늘은 본인이 일러주지 않았더라면 깜빡할 뻔했다. “빵기야, 너 몇 살이니?” “엄마, 저도 이젠 마흔여덟이라구요. 엄만 일흔이 넘었고 아빠도 팔순이시라구요. 저도 쟤들 커가는 것 보느라 나이 먹는 건 생각 못하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창가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골똘한 보스코의 옆얼굴도 참 많이 주름졌다. 


60대 초반 때. 서울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을 좀 보자 했는데 점원이 자꾸 아줌마 냄새가 풀풀 나는 옷만 보여주기에 짜증을 내며 아줌마티 좀 안 나는 걸로 보여줘요!” 했다가 어머, 웃겨! 아줌마도 아니고 할머니면서.”라고 핀잔하는 점원 말에 승질 나서 안 사고 가게를 나오며 내 뒷꼭지에 쏟아지는 눈총을 맞던 날! 그날 너무 서글퍼 눈물을 찔끔 했었는데 이젠 왜바지 아무거나 걸치고 할머니라고 부르든 아줌마라고 부르든 상관 않고  아저씨라고 안 부르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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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내 머리 속은 엄마 생각으로 가득하다. 마치 풀 수 없는 시험문제지를 들고 종 칠 시간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심경이다. 유무상통에 계시는 큰이모도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95세에 죽을 병이 들었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한다. 로사리오를 바치며 기억하다 보면 우리 주변의 지인들과 친척들이 다들 죽었고 우리 차례도 멀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왜 나의 죽음만은 까마득한 미래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질까


저녁나절에 텃밭의 음식물 쓰레기장 옆에서 루콜라 씨를 받느라 앉아 일하는데 음식물 찌꺼기를 뒤지러 왔던 물까치가 내 존재가 성가셨던지 쓰레기를 물어다가 내 머리 위로 확 뿌리고서 날아간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 말라고, ‘정신줄 놓지 말고 살라는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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