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23일 일요일, 맑음


1998522일에 아버님이 하느님 나라로 가셨으니 23년 전이다. 그때 우리 부부는 로마에서 보스코의 안식년을 보내던 중이었다. 평소 심장이 안 좋으시다면서 늘 우황청심환을 드시던 터라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심장병이 원인이리라 예상했는데, 목욕탕에서 넘어져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연세가 88이었으니 어머님이 돌아가시고(1957) 40년을 더 사신 셈이다.


[크기변환]20210523_074631.jpg


[크기변환]IMG_5935.JPG


계모님이 제사를 모시겠다 하셔서 영정과 위폐가 여태까지 전주에 있었는데 올해 계모님이 돌아가시자 큰아들인 우리가 제사를 가져왔다. 동서들과 의논하여, 어머님 기일과 마찬가지로 형제들이 모여 추모하고 형제간 정을 북돋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전통적인 제사 음식은 장만 않고 가족이 즐겨 먹을 음식을 장만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막내동서가 형님이 만든 피자가 젤로 맛있으니 그걸 해 달라기에 금요일 저녁 성염, 성찬성, 성훈 3형제 부부가 (큰서방님은 두 해 전에 죽었고, 둘째동서는 병원에 있어 못 왔다) 피자를 먹고 마을 언덕을 오르내리며 산보를 하고나서 저녁 9시에 위령성무일도와 로사리오를 바쳤다. 매단 마다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4형제를 키워주신 성모님께 빌었다, 시집과 친정의 돌아가신 조상들을 기억해 주십사고.


[크기변환]20210521_202455.jpg


[크기변환]20210521_204155.jpg


토요일 아침에는 줌으로 연결해 서울에서 빵고신부가 위령미사를 집전하고, 장손 빵기는 제네바에서 밤잠을 깨어 화상으로, 우리 다섯은 지리산에서 화상미사를 드렸다. 신세대 후손을 따라 조상님들도 인터넷을 익히실 차례다. 빵고신부는 우리 모두의 아픔을 잘 아는 사제답게 권유를 했다. “지나간 시간에 있었던 아픔과 고통을 통해 하느님은 전혀 딴 곳으로 우릴 인도하시고 치유하시는 만큼, 지나간 그 세월 역시 은총으로 여기고 받아들이자는 강론이었다


좋으신 하느님이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움직이셔서 우리에게 얼마나 잘 해 주셨는지를 알기에 보스코가 자기 묘비에 적어 달라는 시편 구절(116.7) 주님께서 너에게 잘해주셨으니 고요로 돌아가라, 내 영혼아!”그대로다.


5953.JPG


토요일 아침을 먹고 찬성이서방님은 광주로 떠나고, 수십년 허릿병으로 고생하던 막내동서가 모처럼 허리가 괜찮으니 지리산에 온 김에 뱀사골에 가보고 싶단다. 몇 해 전만 해도 차 뒤에 누운 채 휴천재를 찾아왔고 여기 와서도 틈만 나면 누울 자리를 찾던 동서이기에 내가 더 기뻤다. 뱀사골을 걷고 천년송까지 오르내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성씨 남자들이 얼마나 순하고 또 얼마나 어리숙한지를 두고.


막내 훈이서방님이 총각 시절부터 너무 착하고 너무 어수룩해서 나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내동서가 들어와 얼마나 야무지게 남편을 받드는지, 그러면서도 자기 막내아들 돌보듯 잔소리는 또 어찌나 많은지... 정작 퇴직한 교장선생님인 서방님은 초딩 어린이고 동서가 진짜 교장선생님이다. 동서의 여동생들이 언니 없으면 형부는 인생고해를 못 견딜 것 같아서 언닌 죽어도 눈을 번쩍 뜨고 못 감을 껄.” 한다나.


[크기변환]사본 -IMG_6045.jpg


[크기변환]IMG_6071.JPG

???  ???

[크기변환]20210522_122204.jpg


[크기변환]20210522_120211.jpg


지난주 저녁산보 끝에 우리가 집에 들러 잠시 얘기를 나누던 허영감님에게 초상이 났다. “대상포진으로 입원했어, 성심병원에. 밥은 내가 해 먹지만 곧 돌아올끼여.” 라며 아내의 퇴원을 기다리던 그에게 더는 돌아올 아내가 없다니! 지난 몇 해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면서도 영감 밥을 해줘야 하는데...” 라고 걱정하던 아짐은 더이상 남편 밥상 차릴 일도 없어졌다.


오늘 아침 함양에서 발인하여 함안 화장장까지 실려가서 정오 넘어 한 줌 유골함으로 고향에 돌아온 상동댁’(이 동네 그래도 윗켠에서 태어나서 붙여진 택호)은 같은 마을 허총각에게 시집가서, 22녀를 낳아서 키워서 시집 장가 보내서 정들 대로 정든 집을 한 바퀴 돌아 나와 하즙내묘지로 안겨 갔다.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끌거나 절뚝거리며 상동댁을 따라가는 아짐들의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걸음도 앞으로 10년 안에 저 이들 중 몇이나 마을을 지킬까?’ 한숨 짓게 하는 행렬 같았.


[크기변환]사본 -20210523_132237.jpg


[크기변환]20210523_133354.jpg


[크기변환]사본 -20210523_134333.jpg


휴천강이 내려다보이는 '하즙내' 비탈에 허영감은 무슨 예감이 들었던지 부부묘를 큼직한 봉분으로 만들어 두었다. 봉분 왼쪽 한 구석을 구멍 내서 재로 변한 아내를 유골함째 묻기에 보스코가 장난투로 그에게 물었다(허영감은 보스코보다 두 살 아래다). “영감은 오른쪽에 널널하게 관으로 누워서 부인은 왼팔로 상자곽으로 끼고 누울끼라?”


문하마을에서 제일 연로한 중동댁’(올해 96) 할머니가 마을 정자에 앉아 있다 하관을 보고서 돌아오는 우리 부부를 알아 보고서는 늙은 나를 데려가야지 저승사자가 제 정신이 아닌가벼!” 탄식한다. 이어서 하는 한 마디도 퍽 시적이다. “그래도 즈그 논 빼미니께 서방은 논에서 일함서 젙에 누운 마누래한테 말을 걸것고 참하디 참하던 여편네는 냄편의 일하는 꼴 말없이 내려다보것제.” 


상동댁을 바향하러 나온 아짐들: 이 중 여섯이 한 동네 태생들이다

[크기변환]사본 -20210523_135318.jpg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 그리고 '우리 노짱'을 기리는 날. 여자 교우 넷, 남자 교우 둘 여섯이 공소예절을 하고서 승천하신 분이 위로자로 보내주신 성령을 모시고 생이별도 묵은 이별도 고즈넉이 받아들이기로 맘먹었다. 떠나간 분들이 저 위에서 더 잘 보살펴준다는 사실은 보스코네 4형제도, 우리 부부가 살아온 50여년도,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이 겨레의 민족사도 생생히 보여주었으니까. 

 

[크기변환]20210523_14005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