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16일 일요일, 종일 비


요즘은 저녁을 먹고 산보하기에 딱 좋다. 530분에 저녁기도를 바치고 간단한 저녁을 들고 산보에 나서서 산언덕을 오르내리며 로사리오를 합송하는 기분은 천상을 걷는 듯하다. 사방에 찔레와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언덕은 엉겅퀴의 보라빛으로 축포를 쏘아 올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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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인규씨네(동네사람들은 잉구네라고 부른다)에 들러 어머니 병원 다녀오신 결과를 물었더니 위염이 심해서 병원에서 주사 맞고 약을 지어오셨다며 인자 개얀타!”하신다. “엄니 없으면 잉구는 허당인께 건강 챙기고 오래 사세요.” 하고선 나도 지나가며 엄니!’ 부르며 들여다볼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한 마디 보탰더니 이 늙은이 괜히 오래 살까봐 걱정했는데 그러고 보니 생각을 달리 먹어야겠네.”고 반기신다.


도정길 언덕 내리막 마지막 집, 리디아 아줌마도 여러 번의 수술로 건강이 여의치 않은지 공소에도 못 나오고 집에 불도 꺼져 있다. 그 집 모퉁이 찔레꽃은 어스름에 유난히 소담스럽고도 파리하게 눈부셔 되레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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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이들은 잘린 느티나무에 붙어 앉아

깊고 지친 기침들을 하는데

오직 한 그루의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냇가 허물어진 방죽 아래 숨어 서서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을 울고 있었다. (신경림, "찔레꽃")


우리 동네 아래숯꾸지로 들어서서 (폐교된)학교 옆길 첫집. 허씨 아저씨가 마루 끝에 앉아 먼발치를 내다보고 있다. 요즘 이 동네에선 사람 얼굴 한번 보는 것도 호사다. 그냥 지나쳐가려는 보스코를 불러세워 그 집으로 들어섰다. “어째 불도 안 켜고 혼자계신다요?“ ”마누래가 읍내병원에 입원했어, 대상포진으로.” 잠시라도 말벗을 해드리니 얼굴이 환해진다. 그래도 퇴원해서 돌아올, 아픈 아내라도 기다리는 사람은 행운이다. 돌아올 이 없이 한 집마다 방 하나에 흐린 불 하나 켜지고 혼자 떠드는 TV만 바라보다 잠드는 외기러기 안짝들만 가득한 동네다. 어두워지는 동네 고샅길에선 창문 하나라도 불이 켜진 집이면 그래도 삶의 기운이 따스해진다.


어제 오후에 구장과 나눈 얘기에서 금년만 해도 논농사를 포기한 두 집 아짐들이 억지로 자기한테 떠맡긴 논이 일곱 마지기라며 탄식했다. 허씨 아저씨도 강가의 두 마지기 논을 잉구한테 거저 부쳐먹으라고 넘겼다며 한숨 쉬었다. 논밭이 묵어 잡초가 무성하느니 누구라도 부쳐만 주어도 고마운 게 농촌 현실이다. 10년 안에 이 나라 농업이 폐허로 돌아갈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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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 와불산 황새날등으로 오르는 비탈에 사과밭이 있다. 지난 주에 모처럼 인기척이 보인 적 있어 엊저녁 산보길에 그리로 올라가 보았다. 20여년 버려져 있던 ‘서강대연수원을 사서 10여년 가꾸어 팬션을 만들어놓은 곳이지만 코로나로 한 해 넘게 인적이 없다. 팬션의 마당 잔디는 그래도 손질한 흔적이 있는데 언덕 위 아까운 사과밭은 버림받은지 여러 해로 보인다. 우리가 떠나면 아마 남호리 밭도 거두는 사람 없이 호도만 열렸다 떨어지곤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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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에 부면장을 지낸 바오로(보스코가 대세를 주선했다)의 산소에 걸음을 멈추고 주모경을 바쳤다. 옷에 묻은 검불 떼어내듯 그분 무덤의 잡초도 뽑았다. 사람은 죽어도 고인에 대한 따뜻한 정이 하느님 안에서면 이리 새록새록하다. 살아계실 때 산봇길에 휴천재 마당에 들어서며 교수님!’하고 부르던 음성이 귀에 선한데 무덤을 쓴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세월이 그렇게 빛의 속도로 사람을 잊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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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의 밭일이 고됐던지 몸살기운이 들어 오늘은 약을 먹고 좀 쉬었다. 그러나 빗살이 뜸해지자 포트에 심어 키운 해바라기 모종(대모님이 주신 독일 종자)을 마당 가 이곳저곳에 심었다. 잔디밭 풀을 뽑던 진이 엄마가 내게 묻는다. “왜 그렇게 끙끙거리며 일을 하세요?” “힘이 들어서.” “그럼 담에 심으시죠.” “오늘 밤에 비가 온다니까.” “비야 다음에도 또 오잖아요?” 저런 여유로운 마음이 있으니 저 작은 체구로 30년 넘게 그 많은 농사를 짓는가 보다. 속이 밴댕인지 승질이 더러워선지 나는 뭘 못 기다리고 언제나 종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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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만 해도 하느님, 이왕 비를 내리시려면 좀 화끈하게 쏘시지. 마지못해 억지로 내리시는 것 같잖아요?”라고 타박한 내 소리가 그만 하느님 귀에 들어갔나보다.  오늘은 종일 비가 내려 텃밭이 촉촉하게 젖고 논배미마다 물이 찼다


해마다 쌍으로 찾아오던 황새가 올해는 외짝으로 와서 옆 논을 거닐다 솔밭에 앉았다 하더니만 외로움을 못 견디는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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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셋째 일요일이어서 공소에 미사가 있는 날이자 예수 승천 대축일’. 예수님은 쏘아올린 미사엘처럼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던 장면처럼 묘사된 성경 구절이지만, 생자필멸의 한 생을 살고 가는 우리에게는 저 높고 그윽한 곳을 올려다보며 하늘 얘기도 하고 먼저 간 이들을 그리며 살아가게 만드는 희망도 심어주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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