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13일 목요일, 맑음


수요일 아침. 보스코는 텃밭 푸성귀 옆에 박아 둔 기둥과 기둥 사이에 흰 끈을 묶는다. 그 사이에는 가지, 고추, 토마토가 자리를 잡는데 그것들이 키가 자라면 위로 한 가닥을 더 매준다. 끈이 세 가닥 쯤 될 때면 고추가 익고 가지도 주렁주렁 열린다. 고추밭에 끈 묶는 법을 배워 익히는데 10년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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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운서에 사는 어느 할매는 고추농사를 짓고 싶어도 고춧끈 묶어주던 할배가 돌아가서 그만 농사를 접었다고 탄식했는데 납득이 가는 말이다. 고춧대에 끈 묶는 일도 학력과는 관계없이 지혜가 필요하다. 비닐 멀칭도 되는 대로 덮어도 되지만 흙바닥을 골라 놓고 알미늄 고춧대로 흙 위를 한번 훑고 지나가며 높이를 맞추면 이랑이 가지런해진다. 잔돌이나 흙덩이가 위로 솟아 그것만 추려내면 멀칭을 하고 나서도 위가 판판하다. 이건 유영감님께 전수받은 노하우다. 창고마저 안방처럼 깔끔하게 정리하고 쓸어두시던 분의 넋이 그만 몸보다 반 걸음 앞서 가버렸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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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끝 꽃밭에 덩쿨장미가 크면서 바깥 축대를 기어오르는 점령군들의 위세에 기를 못 편다. 호시탐탐 월담을 하려 드니 어제는 보다 못해 내가 낫을 들고 나섰다. 돌축대가 엉성하게 배가 나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데, 본래 축대를 쌓은 아래층 토마스가 ‘30년 가까이 또 큰 비에도 거뜬했으니 무너질 걱정 마세요!’하는 바람에 나도 안심하고 배불뚝이로 밀려나온 축대 위에서 환삼덩굴, 사위질빵, , 거북꼬리를 낫으로 쳐냈다. 보스코도 보다 못해 사다리를 놓고 낫질을 하고 드물댁도 채소밭에 와서 풀을 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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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 논에서는 우리 동네 최고의 농군구장이 논두럭 미장을 멋지게 한다. 머지않아 그 위로는 콩잎이 너플거릴 꺼다. ‘너무 미장을 잘하세요.’ 칭찬하니까 이젠 너무 힘들어 일하기가 싫어져요.’란다. ‘어쩌나! 이 동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다리 끌고 허리 굽은 할매들 뿐인데... 위탁농법으로라도 마을을 살려야 하는데... 그동안 봄철이면 논을 갈아주던 윗동네 이장도 병원엘 들어갔다는데...’ 보스코가 저 나이에 오후까지 자두나무와 배나무에 약을 치고 밭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곱빼기로 감사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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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서 겨울을 난 화분 50여 개를 휴천재 오신 수녀님들 손을 빌어 바깥에 꺼내 놓고 분갈이를 않고 버려둔 채 한 달이 넘자 보스코가 눈치를 준다. 오전 내내 일을 해서 힘은 들었지만 발동이 걸렸을 때 달려야 한다.’ 식당채에서 꺼낸 10개를 합쳐 60개 화분을 손질해서 갈아주고 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데크밑 화단에서 뽑아낸 민트를 씻어 말리고, 텃밭에서 마지막으로 뜯어온 갓과 부추로 김치를 담그고 나니 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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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쉬지 않고 일하는 주부를 향해 휴천재 주인장의 아첨 섞인 한 마디.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 정말 다행이야." (시켜서 하는 일이면 죽어도 안 할 일을 자진해서 하니 고맙다는 뜻 같다.) 그의 칭찬은 언제나 당신 월급 올려 줄게.’로 끝난다. 지난 50년간 집안의 모든 수입은 안주인 손에 장악되어 있는 터이니 순전히 립서비스다.


오늘 새벽 잠자리에서 주말에 비가 오면 남호리에 칡넝쿨이 기승을 부릴 텐데...’ 하는 내 말을 알아듣고 아침 일찍 칡넝쿨과 복분자 가시나무를 토벌하러 가자는 말을 보스코가 먼저 꺼낸다. 나야 오매불망 그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으니 얼른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9시에 남호리에 도착해 1시까지 토벌작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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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가 칡넝쿨을 거둬 괭이로 뿌리 부근까지 후벼 파서 큰가위로 잘라내면, 나는 그 가엾은 상처(?)’에 약을 듬뿍 발라주었다. ‘쥐약이 쥐를 낫게 하는 약이 아니듯이 그 약도 칡이나 나무를 뿌리 채 죽게 만든다는 무서운 농약이다. 굴삭기로 긁어낸 산비탈에 새로 돋는 복분자는 한 포기 잡아 뽑을 적마다 뿌리가 한 가득.


땀 흘리며 일하고서 간식으로 먹는 도너츠 한 개에 커피 우유 한 잔은 보스코에게 꿀맛이리라. 이렇게 힘 들여 일하고 난 뒤에는 평소처럼 칼로리가 높다느니 몸에 좋고 나쁘다느니 잔소리는 않기로 했다. 그의 나이도 나이려니와 코로나 백신 2차접종을 한 터라 은근히 걱정했지만 별 탈 없는 듯해서 맘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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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손님 대접용 케이크를 구우며 김유철 시인이 보내준 산이 바다에 떠 있듯이라는 시집을 읽었다. 경남도민일보에 나온 서평처럼 그의 글은 '역사의 가시밭길 위에 쓴 뼈저린 기록이다` 위안부 피해자, 광주 5.18, 세월호, 용산, 구럼비, 전태일 등 현장에서 몸으로 함께 쓴 글이어서 숨이 턱턱 막히고 분노의 눈물이 주루룩 흐르게 만든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날치기범들아!'하고 외치는 이런 인물을 성서는 예언자라고 부른다


저런 예언자들의 고함을 들으면서도 어린이 급식을 폐지하고 진주의료원을 닫아 요즘같이 코로나 시대에 도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홍준표 같은 인간을 복당시키려는 한나라당이나 서울과 부산에서 그 당에 표를 몰아준 영남인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다.


어제까지 날마다 서늘하기까지 하던 날씨가 하루 사이에 한여름이다. 그동안 엉거주춤 하던 작약이 한꺼번에 피어 꽃밭이 황홀해 정신을 못 차리겠다. 마가렛도 늦봄을 빛내는데 한 몫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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