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20일 화요일, 맑음


며칠간 바람이 몹시 불었다.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보스코는 벗었던 내복을 다시 꺼내 입으며 게면쩍은지 내 눈치를 본다. 보스코의 추위타기는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수녀님들에게 듣기로 수도원의 봄은 5월이 되도록 더디 오고, 겨울은 10월말이면 벌써 복도 끝에서 얼쩡거린단다. 수도원 생활로 젊은 시절을 보냈던 그의 습관이 지금의 나이가 되도록 여전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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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마천 백무동에 함양지리산생태체험단지 튤립이 꽃잔디 사이에서 퍽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도정 체칠리아와 꽃구경을 갔다. 90이 넘으신 체칠리아씨 어머니도 꽃구경을 하신다고 딸을 따라나섰다. 90이 넘으셔서도 꽃을 보고 감탄하고 좋아하시는 모습이 십대 소녀다


어머니를 부축하며 꽃밭 사이의 층계를 오르는 두 모녀의 모습이 꽃보다 더 아름답다. 어머니는 당신이 걸으실 만큼만 걷고는 벤치에 앉아 꽃을 구경하시며 우리 젊은것들에게 짐이 안 되게 우리더러 '맘놓고 한 바퀴 돌고 오라' 하신다. 아흔이 넘어서도 저리도 사리 분별이 정확하고 깔끔하신 걸로 보아 체칠리아의 90대가 내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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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휴천재 텃밭 축대밑 화단에 어디선가 걷어낸 비닐이 한 짐 버려져 있었다. 여러 날 놓여 있기에 구장댁에게 누가 한 짓이냐 물으니 유염감님이란다. 진이엄마에게 "유영감한테 끌어다주고 알아서 치우라고 해야겠다."니까 "이젠 정신줄 놓기 시작하셔서 그러니 어쩌겠어요? 그냥 마대푸대에 담아 학교 앞 쓰레기 하치장에 내다 두셔요."라고 날 타이른다. 서울이나 도시 같으면 언성이 높아질 일도 마을 공동체에서 누가 아프면 마을이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그미 마음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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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늙음도 하나의 질환이니 나을 수 없으면 순응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화요일 아침엔 내가 엄마의 안부를 묻는 날. 대건효도병원 간호사실로 전화를 하니 엄마가 이틀째 먹는 일을 마다하셔서 링거로 연명하시는 중이란다. 그리 오래 가실 것 같지 않다는 간호사의 말에 살얼음에 선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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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백무동 꽃구경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내마마을에 사는, 강레아의 친구집을 방문했다. ‘청풍대라는 커다라 정자 밑에 소꼽장 같이 만들어진 집이었다. 거기 '물결'이라 부르는 안사람과 '바람'이라 불리는 바깥사람 둘이서 잔잔한 물결 위에 흐르는 바람처럼 살면서 우리를 편히 맞아주었다. 처음 만남인데도 어찌나 후하게 대접을 해주는지, 그 집 마당과 마루에서 건너다 보이는 천왕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산사람들만의 넉넉함에 맛있는 서양식 이른 저녁을 배불리 얻어먹고 환담하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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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나절 드물댁한테서 얻어온 대파를 심는데 그 심하던 바람이 갑자기 멈춘다. 휴천재 뒤곁을 치운 판자 조각들이 눈에 거슬리던 참이어서 몇 개 태우기 시작했다. 산불이 날까 봐 불땀을 적게 하여 조금씩 태우자니 시간이 걸렸다. 보스코도 수도에서 호스를 끌고 와서 불길을 감시한다. 그렇게 둘이서 불장난을 하며 로사리오를 바치고 저녁기도마저 하고서도 불길은 잦아들지 않아 호스물을 뿌려 끄고 들어왔다. 비닐이나 플라스틱, 병들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산속이라 나무나 풀은  이웃 아짐들한테 군불거리로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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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하마을에 사는, 75세 이상 어르신들이 화이자백신을 접종받는 날. 93세 중동댁만 합병증을 염려하는 자식들의 만류로 안 가시고 마을 노인들이 군에서 마련한 화려한 VIP 전세버스를 타고 읍내로 단체 마실을 갔다. 보스코는 내 차로 갔다. '80세 베이비와 그 씨터의 나들이' 풍경보호자가 동반을 못하는 시설이어서 그 건물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선 그의 모습이 영락없이 유치원 첫날에 엄마 없는 아이


접종 후 15분간 경과를 지켜보고서 나와 약국에 가서 타이레놀을 샀다. 평화약국 약사 선생님은 아플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점심 후에 한 알, 저녁에 한 알을 아예 드시라고 한다. 언제까지 이 몸살일지 끝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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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하도'와 '중도'에 이어) 방수페인트 마지막 단계 '상도'를 발랐다. 한 평 반 짜리 테라스 바닥을 털어내고 방수 시멘트를 하고, 세 번의 페인트 칠까지 2주 걸렸다. 급하게 할 필요도 없고 천천히 꼼꼼히 하다 보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든다. 어느 신부님이 내 일기를 읽고서 나에게 '페인트공 주부' 자격증을 발부하셨다.


형욱이엄마 데레사씨가 전화를 했다. 오랜 호스피스 활동으로 남에게 봉사해온 상으로, 남편을 편안히 떠나보내는 상을 하느님께 받았노란다. 조언을 해주신 김원장님께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 멀리 호주에 사는 작은아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있어 늘 걱정이 컸는데 마흔 두 살 아들이 드디어 장가를 가 '두 살 어린' 며느리를 보았다고 자랑이 늘어진다


'결혼은 절대 않겠다'던 처녀가 '이제 내 인생 최고의 남자를 만났으니 결혼해야겠다'고 부모에게 알려왔다나? 우리 모두 남편이나 아내를 '내 인생의 최고의 사람'으로 내내 상대방을 바라본다면 참 복된 인생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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