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28일 일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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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 텃밭에 만발한 벚꽃 두 그루와 자두꽃을 배경으로 먼산에도 산벚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온 세상이 환하다. 보스코가 배나무 밑에 신선초를 캐서 커다란 푸대에 담는다. 신선초는 수년간 배나무에 준 퇴비를 실컷 훔쳐먹고 술취한 아재들처럼 푹 널브러져 무성한 뿌리를 펼치고 봄을 즐긴다. 널린 게 먹을것이어서 신선초는 게걸스럽게 뿌리내릴 고생도 없었는지 괭이로 슬슬 건드려도 쉽게 뽑힌다. 그는 산너머 남호리 호도나무 밭을 신선촌로 채울 작정인가 보다. 30여년 묵히다 포클래인으로 긁어 젖힌 땅이어서 땅을 다시 칡과 잡초가 뒤덮기 전에 신선초가 차지하게 만들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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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점심을 먹고 일찍 나섰다. 큰 푸대 셋을 다 심으려면 너댓 시간은 족히 걸린다. 내가 그 땅에 나무 심을 때는 그렇게나 심술을 부리더니 자기가 심고 싶은 것을 할 때는 솔선수범이다. 수녀님이 거두어 가든 미루가 베어가든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리라는 생각에 하나도 힘이 안 드나 보다. 나야 나무든 푸성귀든 심고 가꾸는 게 취미니까 보스코가 하자면 그저 좋아서 따라 나선다.


토요일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아짐들이 밭밭에 바쁘다, 심고 옮기고 거름 주느라남편을 여윈 아낙들은 빈 밭에 20kg 퇴비자루를 등허리로 메다 던져놓는다일은 갈수록 더 고되고 혼자 남은 삶은 견디기가 무적  힘들어진다자식들이야 일 좀 그만하고 노세요!’ 라지만 노는 게 더 힘들다는 건 어찌 갈켜 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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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아직도 부부로 논일 밭일 하는 쌍은 구장네와 이장네뿐이다. 구장네 부부가 휴천재 옆 논 농사 준비로 논바닥에 쌓인 볏짚을 고루 편다. 한쌍은  농사철 내내 두런두런 함께 일하고  한쌍은 남편의 언성과 아내의 쥐 죽은 듯 조용한 모습이 대조를 이룬다. 부부가 함께 하면 일이 바로 놀이고 마음이 맞으면 둘도 없는 친구지만 그 반대면 웬수라고들 하던데... 


남호리에서 돌아와 보스코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텃밭에 유기농 비료 유박과 효소를 양파와 마늘 밭에 슬슬 뿌려주었다. 정성들인 체리나무도 눈을 틔우느라 기지개를 켜고, 비료 부대에 옮겨심은 우엉은 두 번째 떡잎을 올리며 자기가 살아 있다고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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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에 내려서니 바위 사이로는 돈나물, 그 옆에는 흰민들레와 원추리, 흐르는 맑은 물 속엔 돌미나리가 봄맛을 보라고 뽐낸다. 자기 논 옆 개울에서 돌미나리 뜯는 나를 보고 구장은 그 돌미나리, 봄에 나는 풀은 모다 그렇지만 돌미나리 그거 엄청시리 좋은 보약인기라!” 격려한다. 한 바구니 안고 와 다듬는데 드물댁이 소리 없이 와서 거둔다. 풀을 가려 버리는데 풀마저도 미나리처럼 보드랍고 맛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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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온다던 말만 믿고 마른 땅에 꽂아 놓고 온 신선초 모종에 애가 타는데, 하느님은 하나도 안 바쁘신지 늑장을 부리신다. 덕분에 보스코와 아침 산보를 나섰다. 한번 나서기가 그처럼 힘든 보스코도 꽃구경에 홀려 발걸음을 절로 뗀다. 마른 가지에 직박구리들은 반상회를 하고 앞산 뒷산 붉게 타오르는 꽃무리의 몸춤에 넋을 놓는다. 직박구리가 휴천재 감동에 해마다 둥지를 트는데 오늘도 한 쌍이 전깃줄에 오르내리며 집주인의 눈치를 본다. 작년에 깬 새끼일까, 그 어미새들일까? 


점심상을 보는데 드디어 식당채 지붕 위로 비가 지는 소리가 경쾌하다. 아직도 잠든 생명들은 깨워내고 깨어있는 식물들은 걸음마를 시키는 봄비. 하느님이 농부이시고 천하대본(天下大本)인 농사는 하느님이 지으신다는 사실을 이럴 때마다 절감한다("모든 눈이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때에 주십니다. 당신의 손을 벌리시어 모든 생물을 호의로 배불리십니다: 시편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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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3시에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상영하는 미나리를 보러 갔다. 미국도 그렇고 유럽도 마찬가지, 이역땅으로 옮겨가 꿈을 이루기는 힘들고, 그 꿈을 포기 못하는 건 더 괴로운 일. 그냥 평범하게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하면 족한 아낙이 있고, 외국에 나와 고생한 대가로 무언가 이루고 싶은 꿈을 접지 못하는 남자가 한 집에 살면 인생은 늘 갈등의 연속. (지리산 골골에 귀농귀촌하여 혼자 사는 남정들이 무척 많다. 아내는 도회지에 익숙하여 떨어져 살고...)


동양에서 온 사람들 얘기지만 코쟁이들도 모두 자기 얘기요 자기네 부모들의 서러움이어서 흥미를 보이나 보다. 일솜씨 만큼이나 섬세한 한국 영화의 연기와 감성이 아카데미 관련자들의 심금을 울렸을 법도 하고... 나 역시 가난했던 80년대의 유학생활, 내 주변에서 고생하던 이들을 보아왔기에 영화관을 나오면서 그때의 추억에 우울도 하고 심경도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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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지주일! 나뭇가지마다 새가 날고 노래를 부른다. 가림정에 가서 11시 미사를 드리고 진양호를 한 바퀴 돌며 흐드러진 벗꽃을 구경했다.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주님이 오늘 여기에 오신다면 꽃길을 걸으실 텐데... 지척에 이른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당장은 눈 앞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그분의 심경이 어떠셨을까? 가슴이 메인다.

(보스코의 주일복음 단상: http://donbosco.pe.kr/xe1/?document_srl=7176)


집에 돌아오자마자 핸폰이 울린다. 금년 몫으로 주문한 퇴비를 싣고 오는 중이란다. 듬직한 아저씨가 비료 100포를 남호리 땅에다 배달해주었다. 그제 심은 신선초가 어제의 단비에 모두 꼿꼿이 고개를 들었다. 묘목들과 신선초에 말을 걸었다. “얘들아, 저 비료 다 너희들 먹거리란다. 때가 되면 골고루 나누어줄게 기다리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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