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평화 1990.6.1]
 
반공의 우상 앞에서

 
"6.25의 하느님"
 

   기성세대에게는 치가 떨리는 악몽이요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잔혹한전쟁이었다. 한반도 그 좁은 땅에서 5백만의 죽음과 1천만의 이산가족을 낳았으니 또 얼마나 많은 겨레가 그 수년간에  불구가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고향을 잃었던가! 그들에게는 남은 인생 전체가 한과 슬픔과 가난과 불행으로엮어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 신앙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면, 자기 인생과 민족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좀 다른 눈, 신앙의 눈으로 보고자 노력하는일이다. 차를 운전하고 가면서 바깥경치를 구경하듯이,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을 보면서도 동시에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이중시각(synopsis)이 그것이다. 이제 40년의 거리를 두고 저 엄청난 민족상잔의 비극을 어떤 눈으로 돌이켜 볼까? 우리로서는 하느님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신 것처럼, '괴뢰군의 남침'이니 '국방군의 북침'이니 하는 시비와 강대국들의 세력다툼만으로 전쟁이 터진 것처럼 볼 수가 없다.

 

"내가 바라보니...야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거룹들 위에 멈추셨다. '너희는 이 도성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거리거리를 시체로 더럽게 만들었다. 너희가 무서워하는 것은 칼, 내가 적군을 너희에게 불러 들이리라. 내가너희를 이 성에서 끌어내어 적군의 손에 붙이리라. 이렇게 너희를 심판하리라.'

I말씀이 끝나자 거룹들이 날개를 펴는데, 그 거룹들 위에서는 이스라엘의하느님의 영광이 빛나고 있었다. 그 야훼의 영광이 도성 한가운데서 떠올라 동쪽산으로 떠나갔다." 조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예언자 에제키엘이본 환시이다(에제 10-11장). 하느님의 영광이 떠나버리자 유다왕국은 멸망하고만다.

 

1945년, 미쏘가 짜고서 이 나라를 두 동강내어 점령한 다음에 각기 꼭두각시 정권을 세웠다. "저자들은 반동이요 제국주의자들이니 죽여 없애라!"던이북이나, "저자들은 빨갱이요 공산주의자들이니 가서 죽여라!"고하던 미군정이나 겨레가 겨레를 죽여 이 땅을 무죄한 사람들의 피로 철철 넘치게 만들었다.남쪽만 해도 제주도에서, 지리산에서, 대구에서, 서울에서 무수한 동족들이,사상이 어떻다 하여 학살당했다. (요새 통계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숫자는30만이 넘는다. 6.25 새벽에 몰살당한 '보도연맹' 사람들을 합친다면 기가 찰것이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는 성경 구절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죄한 사람들이 죽는 곳에서는 어디나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비명이 있고, 그 악이 찰만큼 차면, 하느님은 그곳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죄벌로 보내시는 듯하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들, 가난하고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짓밟히고 희생당하는 땅에서는 민중의 마음이 떠나고, 민중의 마음이 없는 곳에서는 하느님의 영광도 떠나버린다. 그것은 전쟁과 멸망을 뜻한다.

 

그래서 6.25 전쟁은 악마적이면서도, 해방후 한반도에서 저질러진 이 민족의 범죄를 내려치시는 하느님의 채찍이 아니었을까? 신앙인에게 건네지는 6.25의 종교적 메시지가 이것이 아닐까?

 

그 전쟁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지난 40년간 남쪽의 한국인들은 전쟁만 안일어난다면야, 무슨 짓을 당해도 좋다는 심경으로 살아왔을까? 안보만 내세우면 독재자들이 무슨 짓을 해도 참아냈고, 빨갱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아무리 무죄한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해도 입을 다물고 구경만 하였다. 40만 군대니 미국군이니 핵무기만 있으면 되지 하느님이니 정의니 하는 것은 없어도 된다는 것이 특히나 크리스천들의 태도로 보였다. 하느님이란 반공의 하느님, 내가 쥔것 지켜주시고 내 처자식 살려주시는 '기둥'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전쟁에 대한 공포 역시 전쟁 자체에 못지 않게 악마적이다.

 

그렇다면 6.25 이후로도 38선 철조망 이남에서 무죄하게 죽은 동포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4.19의 학생들과 광주시민들과 삼청교육대와 이철규군을 비롯한 '의문의 변사들'의 피, 분신하는 노동자들의 죽음, 민주와 정의와 통일을 부르짖다가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고 만 수 천 민주인사 학생 노잊a 농민들의비명, 도시변두리와 농촌과 광산에서 하늘에 정의를 외치는 함성들은 어찌하란말인가? 전쟁은 미군이 철수하여 38선 방어가 약할 때 터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을 향하여 오르는 동포들의 비명이 한도가 넘치면 터진다. 민중들 속에 억눌린 저 엄청난 분노와 증오와 절망이 폭발할 적에 그 속에 하느님의 두려운 손매가 나타날 것이 아닌가?
I
도대체 지금이 성금요일인가 부활 새벽인가?

 

그래도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민중을 믿고, 인륜이라는 것을 믿고, 한민족의 장래를 믿자고" 안깐힘을 쓰는데 이 민족이 과연 성금요일에 와 있는지,부활의 새벽인지도 모르겠다.

 

민족사를 구세사의 선상에 올려 놓고 본다면, 해방후 하느님은 수시로 민족적인 구원의 기회를 주셨고(8.15, 4.19, 10.26, 5.17, 6.29와 대선과 총선)그때마다 우리는 은총의 기회를 잃었다, 강대국의 국제정치적 조작과 정치집단의 이기심과 국민의 무책임과 신앙인의 무관심으로!

 

지금도 쇠고랑을 차고 쇠철장에 들어가 있는 저 문익환목사와 문규현신부,서경원의원과 홍성담화가, 임수경양과 임종석군, 반공법에 걸려 투옥된 천여명의 의인들과 더불어 예수 성심 성월을 맞았다. 일단 공안당국의 손에 넘어가면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없다. 모든 언론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는다. 빨갱이라 하여 사람들이 죄다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가기 때문에 우리도덩달아 그들을 업신여긴다.

 

문규현 신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된 바리키야의 아들 즈가리야"

                                                                                                (마태 23,35).

 

     그는 우리들이 섬기는 우상, 우리 성전마다 감실 뒷편에 깊숙히숨어서 나자렛 예수 대신에 경배를 받던 <반공의 우상>의 정체를 폭로하고 말았다. "내게 엎드려 절하면 너희에게 안보를 주겠다." 국가안보를, 집단의 번영을, 교회의 평화를.... 총칼과 맘몬 외에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은 허무주의이거늘....

철창 저편에서 그는 말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상숭배를 멀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 내 말을 판단해 보십시오"(1고린 10,14-15). 그가 앞장서고 다른 사제들이 뒤따라 한국 가톨릭 교회에구마식을 시작하였다.

 

죄는 폭로된다. 그리고 '폭로된 죄'는 이를 갈면서 의인을 십자가로 몰고간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내 폭로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증오의 과녁, 반대받는 표적이 되셨듯이. 믿지 않는 이들 눈에는, 유다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내세워 하느님의 '아들'을 배척하였고 한국 크리스천들은교회의 율법을 내세워 하느님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권세를 잡고 공안정국을 만드는 사람들이 천주교신도들이고 이북 동포를찾아보고 온 교우들을 간첩이라고 잡아가두었다. 그런가 하면 (본인들이 차마그럴 마음까진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제관들이 제관을 형리들 손에 넘겨 주는 일마저 일어났다. 그렇다면 누가 옳으냐고? 분별하기 힘들다. 사람들이 하도 흰소리를 잘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세워주신 기준은하나 있다:  "어느 누가 내 뒤를 좇아오려거든 자기 자신을 버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끝까지 충실하기란 참으로 어렵다.약간은 불충실한 그런 충실로 양심을 무마하며 사는 편이 훨씬 쉽다.

 

I철장에 갇힌 사람들은 적어도 십자가는 지고 있다. 그리고 십자가는 가슴팍에 매다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짊어지는 법 같다. 쬐그맣고 반짝반짝하는 금십자가보다는 투박한 나무나 콩크리트로 된 것이 진짜 같다. 이제나 저제나 성전의 장사꾼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예언자를 자칭하는 이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만 그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믿어주는 듯하다.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숨이 끊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아야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사람이었구나!"(마르 15,39)라고 단언하는가 보다. @(90-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