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신문 2005. 04. 17발행 [818호]

 
"성염 주 바티칸 대사"

"주님, 가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1981년 5월1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일반알현을 행하고 있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울린 총성은 어쩌면 동구권 공산주의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저격범 알리 아그차의 배후로 밝혀진 불가리아와 러시아 비밀경찰은 국제정세만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청의 도덕적 권위가 갖는 정치적 파급력은 머지않아 폴란드인 교황의 조국을 비롯하여 동구권 전체 국민들로 하여금 현실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정치적 결단을 초래하리라는 예측 말이다. 더구나 16세기 '파도바의 수도자'가 남겼다는 예언에 따르면 이 교황은 "자기 피로 돌바닥을 적시고 결국은 목숨을 앗기우리라"는 운명까지 타고 나지 않았던가? '나는 오로지 당신의 것'(TOTUS TUUS)이라면서 교황이 헌신하던 파티마 성모님이 기적적으로 그를 살려 당신의 두번째 비밀을 실현시켰지만 말이다.

 그리고 2005년 4월8일, 전 세계는 목격하였다, 동구권 국가 정상들이 유럽연합에 가입하였거나 가입 후보로서 서구 정상들과 무릎을 맞대고 이 교황의 장례미사에서 함께 영성체하고, 미국과 이스라엘 정상이 아랍권 정상들과 식장에서 악수 나누는 모습을! 독도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창 사이가 불편한 대한민국의 이해찬 총리와 일본의 가와구치 요리코 전 외무장관도 앞뒷줄로 앉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살아서 못지않게 죽어서도 인류를 화해시키는 듯 하였다.

 바티칸은 공평하였다, 공식 조문사절단들에게도. 장례식장에서 세계 최강 미국에도 다섯 석(그래서 아버지 부시, 클린턴, 케리 후보도 제단 아래쪽 손님석에 앉았다), 교황청 다음으로 작은 나라 산마리노에도 다섯 석을 배정하였고, 영국 찰스 왕세자 부부가 상석을 차지하는 바람에(사절단장인 국가원수나 행정수반에게 한 자리씩 주고 나머지 네 명은 뒤로 가서 빈자리에 앉으라고 하였다) 블레어 총리도 나보다 뒷줄에 앉아있었다. 2003년 7월4일 필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대사 파견 신임장을 제정하던 날, 한반도 핵문제를 "점진적으로, 공평하게, 검증 가능하게" 해결하라던 교황님 당부가 떠올랐다. '공평하게'라는 말마디는, 남한이 강대국 핵우산 밑에 있을 때 무원고립 북한의 불안은 오죽 하겠느냐는 뜻 같다고 누가 풀어주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황청 정책은 중립이다.

 로마에 쏟아져 들어온 순례객 400만 대부분은 젊은이들이었다. 여남은 시간 줄섰다 10초씩 시신을 참배한 사람들도, 광장 앞에서 밤을 새우고 나서도 선채로 세 시간 가까운 장례미사에 참석한 이들도 거의 젊은이들이었다. 임종 전날, 40년 가까이 시중든 스타니슬라프 대주교만 알아듣는 입술놀림으로 "자네들을 기다렸어. 와 주었구먼. 고마우이"라는 마지막 말씀도 젊은이들에게 건넨 인사였다. 그래서 유럽 언론들은 교황의 죽음이 "하느님이 죽은 세계에 하느님을 돌아오시게 하였다"는 제목을 달았는데 젊은이들 세계를 가리키는 듯하다.

 우연인지 그분의 기조사상이 담긴 처음 세권의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자비로우신 하느님」(1980), 「사회적 관심」(1987)을 번역하여 그분의 사상에 친숙해서인지 평소에 필자는 이 교황이 베드로보다는 바울로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재임 중 행한 104차례 사목방문(우리나라 방문 두 번)과 14편의 회칙 반포 때문이기도 하리라.

 역사상 전무후무할 성대한 장례식이지만 결국 소박한 삼나무 관에 누워 흙속으로 묻혀가는 이 노인에게서 들었던 마지막 메시지가 지금도 귓바퀴에 맴돌고 있다. 부활절 정오 베드로 광장 회랑 지붕에서 들었던 하소연, "주님, 가지 마시고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불과 네 문단에 여덟 번이나 되풀이하며 암담한 이 세기를 두고 가면서 엠마오 제자들의 심정으로 주님께 드리던 절절한 애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