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톨릭학술상
가톨릭신문사가 주관하는 "한국가톨릭학술상"의 본상이 주어졌다.
2020년 11월 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행사가 열렸다.
행사는 가톨릭신문사 유튜브로 실시간 중계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swTML-75Hk
(1) 가톨릭신문은 2020년 10월 15일자로 본인과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47971
[제24회 한국가톨릭학술상 특집] 본상 - 아우구스티노의 「삼위일체론」 번역한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교회문헌 번역, 제게는 선교 소명과도 같지요”
새벽부터 하루 10시간 이상 작업에 몰두
수십 년간 교부들 문헌 번역에 투신하며
한국교회 학문 연구 기반 다지는 데 큰 기여
“많은 이들이 신앙 원천에 깊이 들어가게 되길”
발행일2020-10-18 [제3215호, 10면]
(2) 시상식 행사는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15일자에
"제24회 한국가톨릭학술상 시상식"
"시상식 이모저모·수상소감"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49507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349555
(3) 시상식에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수상소감을 발표하였다.
“형제애가 곧 하느님이다”
성 염 (수상소감)
어려서부터 교회의 치맛자락에 싸여 자라고 활동하면서 번역을 생업으로 삼아온 제게 가톨릭학술상이라는 과분한 격려를 보내주신 가톨릭신문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존경하던 평신도 신학자 (고)양한모 선생님을 추모하며 이 상의 제정 심사 운영에 관련하시는 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 달 전 발표한 회칙「모든 형제들」(특히 42-44항)에서 거의 모든 언론들이 국민들 사이에 극단적 증오와 분열을 선동하면서 사회문제를 외면하케 만드는 책략이 사실상 초국가적 신자유주의 기업들이 벌이는, “분열시켜 통치하라!”(상게서 12항 참조)는 전략임을 우려하였는데, 가톨릭신문이 최근 수년간 민족화해와 환경보호, 이주민 환대와 생명수호의 사회복음을 꾸준히 선포해오신 노고를 두고 이 자리에 임석하신 조환길 대주교님과 신문사 김문상신부님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움을 표합니다.
저에게 주어진 상은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생생하게 전수받은 교부(敎父)들이 계시 진리를 인간다운 지혜로 펼쳐온 노력을 교회의 성전(聖傳)으로 받아들이고, 교부들의 원전이 우리말로 옮겨지는 활동을 복음 선포의 일환이자 신앙의 토착화로 환영받는 표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특히 신구교 크리스천이 전체 인구의 25% 정도인 한국사회에서 1987년부터 라틴어-한글 대조본 ’교부문헌총서‘(「삼위일체론」도 그 중 한 권입니다)를 발간하는 분도출판사의 문화적 공적은 담대하고도 희생적이며, 70년대부터 해방신학, 노동신학, 여성신학, 환경신학 분야를 선도하는 도서를 출간해온 분도수도회와 분도출판사는 한국사회 지성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느님, 당신을 알고 싶고 나를 알고 싶습니다”며 진리탐구에 평생을 바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학문적 작업은, 인간이 비록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의 오성은 사유된 모든 대상, 전유주를 둥그런 원에다 한정지짓는 능력, 어쩌면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느님마저 자기 지성으로 포괄하는 능력(capax dei)을 깊이 천착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점에서 하느님을 포괄할 만하다는 점과 하느님께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다.”(삼위일체론 14,8,11)는 선언대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찍이 「고백록」에서 인간 실존의 추동력을 헤아리며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제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나의 중심은 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내가 끌려갑니다.”(13.9.10)라고 고백함으로써, 인간은(그 소속집단과 더불어) 사랑으로 구원받거나 사랑으로 파멸함을 간파하였고, 「신국론」에서는 인간 개개인이나 일정 정치사회적 집단이 어디에 소속하느냐를 ‘두 사랑이 있어 지상국과 신국, 두 도성을 이룬다.’고 선언합니다.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성을 건설했다. 하느님을 멸시하면서까지 이르는 자기 사랑이 지상 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까지 이르는 하느님 사랑이 천상 도성을 만들었다.”(14,28) 다른 저술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두 사랑이 있으니 하나는 사회적 사랑(amor socialis)이요 하나는 사사로운 사랑(amor privatus)이다. 하나는 상위의 도성을 생각하여 공동의 유익에 봉사하는데 전념하고, 하나는 오만불손한 지배욕에 사로잡혀 공동선마저도 자기 권력 하에 귀속시키려는 용의가 있다. 하나는 이웃을 다스려도 이웃의 이익을 생각하여 다스리지만 하나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스린다. 천사들로부터 시작해서 한 사랑은 선한 자들에게 깃들고 한 사랑은 악한 자들에게 깃들어서 두 도성을 가른다. "(창세기 문자적해석 11,15,20)라고 하였습니다.
교종 베네딕토 16세는 당신의 첫 회칙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1500년전에 말한 ‘사회적 사랑’이란 다름 아닌 ’정치‘라고 단언하였으며(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9항) 현 교종 프란치스코는 한 달 전 인류에게 건넨 회칙 「모든 형제들」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회적 사랑’을 ‘정치적 사랑’(l’amore politico)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그 ‘정치적 사랑’이란 “모든 인간 존재를 형제요 자매로 인식하고, 만인을 포괄하는 사회적 우정을 모색하며... 실제적 가능성을 담보하는 효과 있는 구제 방법을 찾아내는 결단과 능력”(180항)이라고 했습니다.
인류가 하느님께 받은 가장 신비로운 귓속 말씀, “나는 하나이지만 혼자가 아니란다.”(성 힐라리오)는 계시를 신학적으로 고찰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라는 사도 요한의 하느님 정의에서 “사랑을 보는 사람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삼위체론 8,8,12)라는 명제를 끄집어내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 곧 형제애가 하느님으로부터 옴은 물론이려니와 바로 하느님이기도 하다”(상동)는, 그리스도교 역사의 가장 과감한 사회교리를 이끌어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삼위일체론」에서, 3천년기 인류의 운명을 가름할 기조어 ‘형제애’ 혹은 ‘사해동포애’를 ‘하느님’이라고까지 명명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현대인들에게도, 사회교리 선포에 복음화의 미래를 걸고 있는 교회에도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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