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9일 일요일, 맑음


오랜만에 공소예절에 갔는데 대림(待臨) 첫 주일곧 가톨릭교회의 달력으로는 새해 첫날인데도 사람이 적었다. 김장철이라 도시에서 자손들이 김장을 하러 오기도 했고(동네에서 입교한 분들은 자손들이 고향에 내려오면 성당에 못 나올 사연이 된다), 아짐들이 80이 넘은 나이라 교구에서도 코로나 역병으로 주일미사나 공소예절을 관면(寬免)해 준 터다. 역병이 훑고 지나간 삭막한 산속마을길은 인기적 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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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일찍 체칠리아가 장에 가잔다. 함양장은 27일이어서 그날 장에서 새우 황새기 그리고 젓갈류를 사고 김치통과 큰 소쿠리도 샀다. 김치통은 매해 사야 하는데 김치를 담아주면 통까지 소화를 시키는 바람에 장에서 통파는 장수도 먹고 산다. 두어 시간 안에 전투를 하듯 시장을 보고 달려 돌아와 점심을 먹고 알타리 김치와 갓김치를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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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나올 때 보스코가 알타리무를 뽑아 놓겠다더니 알타리 무 이랑 것을 다 뽑고 김장 무 이랑에서도 작은 것들을 골라 뽑아다 잘 다듬어 우물가에 실어다 놓았다. 다시마와 멸치 디포리 새우 명태머리 버섯 무우 양파로 내린 다시물에 찹쌀죽을 쑤어 마늘과 생강 다진 것을 고춧가루로 풀어 젓고 새우젓 멸치액젓, 생새우 황새기, 파와 청각 미나리를 썰어넣고 휘저으니 소가 마련되었다. 마천 오띨리아네서 가져온 돌산갓은 잎이 너무도 연하고 커서 갓김치 담기 딱 알맞다. 알타리와 갓김치를 담고 나니 자정이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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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김장하느라 바쁜 시간에 제네바 작은손주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드는 사진을 보냈다. 세상에! 갓 태어나서는 눈도 안 뜨고 몇 달을 보냈고 두 돌이 지나도록 걷지를 못해 어멈과 두 할미 애간장을 무척이나 태우더니만 이젠 너무너무 정상으로 자랐다. 두 노인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가


해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주로 보스코가 맡아 꾸미기 때문에 언젠가 손주들과 함께 트리를 꾸미는 것이 그의 꿈이기도 했다. 조손이 함께 꾸미는 크리스마스트리는 물거품이 되었지만 멀리서나마 축일을 축일답게 준비하고 트리를 장식하는 손주의 사진은 그를 흐뭇하게 만든다. 우리 부부가 하느님께 착하디착한 아들을 둘 배급받았는데 손주도 좋은 아이들로 배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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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의 책도 선물받았다. 카렌 암스트롱이 쓴 ()의 시대신을 위한 변론은 김원장님이 보내셨고, 길 진리 생명 해설 성경 신약편은 이봉하 수사님이 보내주셨다. 해설성경은 보스코가 자주 애용할 것이고, 카렌 암스트롱의 책은 . . .사피엔스처럼 두꺼운 책이지만 술술 읽힌다. 코로나 시절에 도시에 나가지 말고 산 속에서 책을 열심히 읽으라는 우정의 메시지가 담긴 선물들이다. 카렌의 두 책을 관통하는 한마디는 종교의 핵심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있다.”는 주장 같다. 김장 끝나면 뭘 할까 걱정할 것 없게 해준 분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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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서울에서 일보느라 바빴던 귀요미가 내려오자마자 어제 토요일 우리를 산청으로 초대하여 내 영명축일 잔치를 해 주었다. 식사 후, 찻집을 해도 넉넉할 만큼 많고 예쁜 다기(茶器)를 수집해 놓고 사는 미루가 앙증맞은 다기를 내놓고 차 대접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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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마천 오띨리아씨가 절여놓은 돌산갓을 준다기에 가지러 가려는데 드물댁이 문상마을 쪽으로 산보를 가고 있다. “심심한데 차타고 우리 유람 갑시다.” 하니 얼른 올라탄다. 그미가 동네를 나가는 일은 두 달에 한번 혈압약 타러 읍내 병원에 가는 일이 전부이니 자가용 타고 마천이라도 간다면 다른 아짐들한테 부러움을 살 게다. 갓만 싸들고 돌아오자니 유람(遊覽)’이라기엔 동선이 너무 짧아 칠선계곡으로 오르다가 왼쪽 위에 있는 서암정사에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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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찰이 지척에 있어도 외지사람만 구경들 오고 동네 사람들은 있는지도 몰러.”라는 드물댁의 감탄. 남자고무신에 뒷짐을 짓고 갈지자로 유람하는 아줌마가 전각마다 부처님마다 그 앞에서 두손 모으고 열심히 머리를 조아리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경건하다. “부처님들께 뭘 빌었어요?” 물으니 불상마다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단다. 아들 한 개(이 동네에서 자식은 갯수로 센다)는 그리도 귀한데 그 집 딸 네 개는 어미가 안 빌어줘도 잘 살아가는지, 부처님 아니면, 하나님이 돌봐야 할 몫인가 보. 축의 시대에 나오는 대로, 지구 각지에서 출현하신 성현들의 사명이 어슷비슷들 하니까 누구에게라도 빌면 마음이 가닿는 분에게서 염력이 미치려니....


며칠째 밤늦도록 일하는 내 발자취를 따라 다니던 달빛이 왕산위로 솟아올라 구름을 젖히고 내려다본다. ‘나 보름달이야!’ 찬바람으로 추워진 밤공기에 처연한 빛이 유난히 더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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