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6일 화요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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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집 총각이 전화를 해왔다누나가 서울로 이사를 오는데 같이 방을 얻어 살잔다며 11월 초에 방을 빼고 나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우리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으니’ 잘 가라고 답해주었다친구 한목사의 부탁으로 송총각을 처음으로 아래층 전세로 받아들인 후 손총각’, ‘라총각은 집사처럼 집을 돌보고 식구처럼 지냈다그 총각들은 요즘 청년들 같지 않아 특별한 정서적 연대감을 느끼며 한 식구처럼 살다 결혼하면 아내에게로 떠났다.누군가 어디선가 또 다른 좋은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


보스코 말마따나 모든 만남이 은총인 까닭은 하느님의 은총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내린다는 사실을 자기 평생을 통해서 체험했기 때문이다우리를 찾아오는 손님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방문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은총인지도 정현종 시인이 잘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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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낼 수 있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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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굴댁과 드물댁은 단짝 친구다. 사람들이 그 둘 사이를 시샘하여 끼리끼리 논다고 해도 둘은 개의치 않고 멀찌기 떨어져 자기들만의 세계를 즐긴다. 거문굴댁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버렸을 때도 그 집에서 밤마다 잠동무를 하며 위로해 준 사람은 드물댁뿐이다. 요즘도 드물댁네로 그미가 놀러와서 밤이 늦어도 집으로 안 가고 여긴 내 친정 같아서 가기 싫다고마!’ 하는 거문굴댁은 사실 친정이 없어 시집의 홀대를 받으며 많이도 울었단다. 좋은 친구란 물이나 공기 같아서 옆에 있어도 없는 듯하지만 늘 소중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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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뒷짐을 진 드물댁과 그 곁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운동한다고 윗마을로 마실가는 둘의 모습에 가슴이 따스했다. 이제는 남편도 자식도 심지어 강아지도 없이 휑~한 집에 혼자씩 남겨진 여인네들... 삶의 마지막 고갯길을 의지할 친구가 남편만큼이나 귀하다.


오늘도 밭에서 열무를 솎아 국거리를 장만하고, 호박덩쿨을 들쳐 잎으로 덮어 몰래 감쳐둔 애호박을 센다. 열개가 훨씬 넘는 조막만한 열매가 올망졸망 모여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날 본다. 친구들이 가까이 있으면 한 개씩 안겨주면 좋으련만....


올해는 수세미농사도 망쳤다. 모종을 사다 심으면서 거름을 안 주어선지, 장마로 고생을 해선지 휴천재 이층 데크로 올린 것들 중에 한 포기만 제대로 열매를 맺었고 나머진 '마지못해' 살다 간 듯하다. 어제 줄기를 잘라내고 물을 받기 시작했는데 비록 한 포기에서나마 벌써 세 병이 받혔다. 우리 일년 쓸 양으론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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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고추를 얻으러 태우할머니댁에 갔다. 1000평이나 되는 고추 밭, 다른 때 같으면 늦게 열린 붉은 고추가 탐스러울 철인데 올해엔 긴 장마에다 탄저병에 지칠대로 지친 고춧대에는 찬바람에 겨우 한숨 돌린 풋고추가 이제사 열리기 시작했다. ‘저걸 미쳐 다 못 따 먹고 서리가 내리면 아까워서 어찌할까?’ 태우할머니는 가지랑 깻잎도 사모님 주려고 남겨서 기다렸는데 어데 갔다 이제 오노?’ 하시며 얼마든지 따가라 하신다. '주고자푼 병'의 증세가 심각한 노인이다. 전염성이 강한 그 병에 걸린 나 역시 앞치마 가득 따온 풋고추를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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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녁에 태우큰아빠와 할머니가 휴천재에 내려와 나를 찾는다. 오늘 새 덤프트럭이  나왔단다. 어머니에게 소위 '시승식'을 해드리고 나한테 새 차를 보여주러 왔단다. 고사를 지냈다며 한잔하라고 막걸리도 한 병 내미는데 친구도 안주도 없으니 술빵이나 만들어야겠다


먼저 덤프트럭과는 언덕 위에서 주인이 끌어안고 함께 구르기도 했고, 그 사고로 다리를 자를 뻔도 했고, 이틀 벌어 모은 돈 톡톡 털어 넣어 치료를 받는 둥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는데 싹 망해먹고야 끝내는 남녀관계처럼 이제야 헤어졌다며 시원섭섭하단다. “새여자 만난듯 새 차 만났으니 무탈하게 돈 잘 벌어 마음 편히 엄니 모시고 잘 살라고 덕담으로 화답했다. 선하고 성실한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꼭 보여주길 바란다.


가톨릭신문사에서 제24한국가톨릭학술상’(본상)을 보스코에게 준다고 신문에 났다. 보스코는 평생 번역일로 살아왔는데 몇 해 전에 번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수상작으로 채택했다는 소식이다. 그가 청년시절 편도선 수술로 (명동) 성모병원에 며칠 누워 있으면서 번역했다는 돈보스코 이야기를 출판한 게 1966년이니 55년간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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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늘 책상 앞에서 긴 시간을 책과 함께 한 나날들에 대한 가톨릭 사회의 인정이랄까? 나야 고맙고 기쁜 일이지만 큰아들이 멀리 있어 이런 날 함께 못하는 건 아쉽다. 그래도 작은 아들과 '딸들'이 넷이나 있으니 다행이다. 보스코는 제네바에서 손주 시아가 한 축하 전화로 만족할 줄 아는, 욕심이 작은 사람이다. 며느리와 큰아들도 전화를 했다. 슬플 때 위로받고 기쁠 때 함께 반겨줄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고맙다. 우리가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그분 뜻에 따라 세월이 가는데 천국 입장은 단체 입장만 허용된다!’는 말도 갈수록 그럴 듯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