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929일 화요일, 맑음


월요일 아침이다. 가을, 푸르고 맑은 하늘에는 해보다 더 붉은 대추가 조랑조랑 매달려 추석을 기다리고 있다. 아침을 먹으며 대추를 따야겠다 하니 이슬이 내려 잎이 젖어있으니 나중에 따자는 성나중씨 보스코. 어떤 상황에서도 나중에 해야 할 이유를 찾아내는 데는 따라갈 사람이 없다. 오후에 따게 되면 언제 씻고 언제 말리냐고 성화를 하자 장대를 들고 뒤꼍으로 돌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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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에서 제일 단 대추여서인지 지나는 사람마다 우리 보일러실 지붕을 살짝 밟고 올라가 한줌씩 따먹기 땜에 그 사람들 혹시 양철지붕에서 떨어질까 위험해서 하루라도 빨리 따자는 게 내 생각이다. 보스코는 보일러실 지붕 위와 뒤꼍에 비닐판을 깔고서 한길 위에서 장대로 두드려 대고, 나는 식당채 지붕위로 올라가 손으로 땄다. 다 따기는 좀 아쉬워 아직 파란 알맹이가 많이 달린 가지는 하나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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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싹 써버리는 일이 없었다. 고기를 반근 끊어와 국을 끓여도 조금이라도 남겨 다음에 어딘가에 쓰셨다. 곡식도 싹 털어먹는 일이 없이 한줌이라도 남겨두어 다음을 대비했다. 그걸 보고서 자라 나도 언제부턴가 엄마와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엄마를 뵌 지 반년이 넘어간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명절에 집에 모시거나 병원에라도 찾아가 함께 지냈을 요즈음... 하루하루 마음이 불편하다.


엄마가 정말 외로움을 모르시는 걸까? 우리가 안 보이는 이유도 모르는 채 흐르는 시간이 엄마의 삶에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짐작하듯이 정말 엄마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면 어린아이 같은 엄마를 버려둔 채 우리 자식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저게 바로 머쟎은 나의 미래라면 나는 내 마지막 삶을 어떻게 맞아야 할까? 인생도 가을이 되어 모든 게 영글어 열매 맺고 마무리할 시간이다. 엄마가 많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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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속의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김용택, “가을”)


김원장님이 깜짝 휴천재 나들이를 했다. 우리야 언제 보아도 반가운 사이. 가을이 쓸쓸한 것은 그리운 사람들은 어서 빨리 만나고, 만난 사람은 헤어지지 말아야 길고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다는 언지다. 포도를 한 상자 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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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로 두들겨 딴 대추를 정자에서 골라 크고 달고 만난 건 과일로 먹으려 냉장고에 넣고, 작거나 상처가 있는 건 말리려고 덕촌댁 건조기에 넣었다. 어제 덕촌댁이 논가에 숨어있던 커다란 호박을 주었는데 그걸 잡아 호박고지를 만들어 겨울에 찰시루떡 해먹으려 함께 넣었다. 식칼로 그 단단한 호박을 잘게 썰어준 것은 드물댁이다. 정자에서 보스코와 김원장님이 담화를 나누는 동안 곁에서 소리없이 도마질을 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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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일은 그 종류와 양이 늘어나게 마련. 보스코를 인터뷰하러 가톨릭신문사 주기자와 사진기자 그리고 편집국장이 휴천재를 찾아왔다. 편집국장은 젊어서부터 보아온 얼굴이고 보스코에게 다른 기회에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낯이 익고 반가웠다. 보스코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번역가로 살아온 반백년을 신문 한 면에 어떻게 간추려 소개할지 주기자의 능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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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부엌에서 피자를 준비했다. 마을 근처에는 식당도 없고 시장도 없으니 우리 텃밭의 푸성귀가 총출동하는 요즘. 1. 루콜라 방울토마토 팔미쟌 피자, 2. 호박 가지 버섯 양파 피자, 3, 모짜렐라 고르곤졸라 팔미쟌 페코리노(콰트로 포르마지 피자)를 구웠다. 대구에서 함양까지 오고 인터뷰에 시장들 했는지 피자가 잘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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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촌댁의 건조기에서 어제 넣은 대추와 호박고지를 깔끔하게 말려서 들고 휴천재로 올라오니 태우할머니가 나 준다고 깻닢을 따가지고 와서 집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태우 큰아빠가 차도 샀고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돈도 나왔다는 얘기를 들려주시는데 그 동안 함께 걱정하던 나를 안심시키러 일부러 내려오신 길이었다, 그 어려운 걸음으로. 추석에 보름달 뜨듯, 가난하고 힘든 마음마다 밝고 환한 대보름달 기운이 가득하기를.... 잘사나 못사나 우리 인생들은 얼마나 가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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